(흑룡강신문=하얼빈 2007. 01. 17)
조선의 외교는 사람들에게 신비로운 감을 준다. 조선의 외교관들도 흔히는 세인이 주시하는 초점인물로 되고있다.
조선의 백남순 외무상이 올해 1월 2일 서거한후 조선중앙통신은 3일 이 소식을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조선의 김정일국방위원장이 백남순의 령전에 화환을 보내여 애도의 뜻을 표했다. 이는 조선이 서거한 고위관계자의 후사를 처리하는 일관된 방법으로서 서거한 고위관계자에 대한 당과 정부의 정치적 인가를 구현하는 한편 고인의 유족에 대한 김정일국방위원장의 배려와 위로를 구현한다.
사실상 최근년간 일련의 국제사무에 빈번히 모습을 드러내는 조선 외교관들을 볼때 그중 4명이 조선의 외교무대에서 비교적 활약, 그들로는 이미 서거한 백남순을 제외하고도 강석주 제1부상 그리고 김계관부상과 김영일부상이 있다. 그들의 공통한 특점은 명문대학을 졸업하고 한두가지 외국어를 류창하게 구사할줄 알며 풍부한 외교 및 국제담판 경험을 갖고있는것이다.
백남순: 외무상 담당 8년간 수차 중국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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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7월 2일 백남순(오른쪽)과 당시 한국 외교통상부 반기문장관이 인도네시아 수도 자카르타에서 회동. /자료사진 |
조선중앙통신은 백남순의 사인을 피로하지 않았다. 하지만 80세에 가까운 백남순은 지난해 중반부터 몸이 편치않아 아세안지역포럼이후 국제장소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백남순은 1929년 조선 량강도에서 태여났고 조선 최고학부인 김일성종합대학을 졸업했다. 조선 내각 외무상직을 1998년 9월부터 8년동안 담임했다.
백남순은 외무상을 담임한 기간 수차 중국을 방문, 근년에는 2006년 5월말에 중국을 방문했다. 그의 서거소식을 접한 당가선 중국 국무위원과 리조성 외교부장은 각각 조전을 보내여 애도의 뜻을 표한 동시에 그 유족을 위로했다. 그런가 하면 적대관계에 있는 미국의 매코맥 국무부 대변인도 기자회견에서 백남순의 서거에 애도의 뜻을 표시, 이로부터 백남순의 위망이 어떤가 하는것을 얼마든지 알수 있다.
강석주: 리조성과 한 침실에 주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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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영나온 미국 국무부 조선관계 담당자와 악수하는 강석주 제1부상(오른쪽). /자료사진 |
백남순이 조선 외교의 제1인자로 있었지만 조선 외교사무에서 중대한 역할을 하는 사람이 또 있다. 즉 김정일국방위원장이 외국 손님을 회견할때면 필요한 통역외 또 한 사람이 자리를 함께 하군 하는데 그가 바로 강석주 제1부상이다.
강석주는 일찍 북경대학에서 영어를 연수, 그후 외교분야에서 사업했으며 1986년부터 지금까지 20년간 제1부상직을 맡고있다. 강석주는 조선 외교계에서 경험이 풍부하고 영향력이 크다는 공인을 받고있다.
조선반도의 핵문제가 처음 발생했을때 조선과 미국의 관계는 일촉즉발의 상태에 있었다. 이 무렵인 1994년 김일성주석은 카터 미국 전 대통령에게 조선방문을 요청, 김일성주석과 카더 전 대통령이 회담할때 강석주부상이 자리를 같이 했다. 김일성주석이 서거한후 김정일국방위원장의 신뢰를 얻은 강석주부상은 조선대표단을 이끌고 미국과 간고한 담판을 진행, '핵프로그램 동결'을 대가로 미국으로부터 '2개 경수로와 매년 50만톤의 중유'지원을 획득, 조선 외교의 중대한 승리로 인정받았다. 소식에 따르면 김정일국방위원장은 강석주부상이 제네바에서 개선할때 그에 대한 포상의 뜻으로 공항에 붉은 주단을 깔고 영접할것을 지시했다고 한다.
보다 의미가 있는것은 김정일국방위원장의 외교사무에서의 제일 조수인 강석주부상이 리조성 중국 외교부장과 대학시절 한 침실에 주거했었다는것이다. 이로인해 '한 침실에서 2명의 외교부장이 나왔다'는 미담까지 있게 됐다. 리조성부장은 1959년부터 1964년까지 북경대학 영어학부에서 공부, 학교에서는 학습과 생활면에서 외국류학생을 '지도'할수 있도록 그와 외국류학생을 한 침실에 주거하도록 했다. 그리하여 리조성부장은 북경대학에 연수하러 온 강석주부상과 2년동안 한 침실에 주거했다.
그로부터 40년후인 2004년 3월 리조성부장이 조선을 방문하고 김정일국방위원장과 회담할때 강석주부상이 주요 수행일군으로 참석했다. 리조성부장은 김정일국방위원장과 인사를 나눈후 '오랜 동창생'과 뜨겁게 포옹했다.
김영일: 중국대사관을 가장 많이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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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수하는 김영일부상(오른쪽)과 당가선 중국 국무위원. /자료사진 |
2003년 조선핵문제관련 제1차 6자회담이 북경에서 진행됐다. 당시 부상으로 있던 김영일이 인솔한 조선대표단이 제1차 6자회담에 참석, 국제언론의 초점으로 됐다.
김영일부상은 프랑스어를 전공하고 아프리카 사무를 담당했지만 지금은 아시아와 대양주사무 담당 부상으로 있다. 그때문에 김영일부상이 조선주재 중국대사관을 찾아 우호행사에 참석하는 차수도 가장 많았다. 조선핵문제 해결작업이 갓 시작됐을때 김영일부상은 회담준비를 하고 여러 나라와의 정책 조률을 하는 주요 책임자로 있었다.
체격이 크지않은 김영일부상은 늘 웃는 얼굴로 사람을 대한다. 기자는 접촉을 통해 그는 인정이 많고 기자들의 사업을 념려해준다는것을 알았다. 현지 규정에 따르면 외국인 상주 기자는 취재할 경우 사전에 신고를 하고 허가를 받아야 한다. 하지만 이렇게 하려면 시일이 걸리고 게다가 전화통화를 제대로 할수 없어 부득불 독단적으로 행동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김영일부상은 기자가 사전통보없이 문뜩 나타나더라도 싫은소리 한다미 하지 않는가 하면 사진을 찍도록 포즈를 취하군 한다.
김계관: 6자회담때부터 이름 날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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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2월 18일 제5차 6자회담 제2단계회의 개막식에 참석한 김계관부상(앞줄 오른쪽). /신화사 |
김계관부상은 지난 세기 70년대초 외교분야에 투신하고 또 다년간 미국관련 사업에 종사해 미국사무 전문가로 거듭났지만 조선핵문제 6자회담때부터 진정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김계관부상은 미국과의 핵무기, 미사일 교섭 등 사무를 책임져왔기에 대미국 협상경험이 풍부하다. 조선은 제2차 6자회담때부터 김영일 대신 김계관부상을 조선측 수석대표로 지정했다. 6자회담 미국대표단 힐 수석대표는 "김계관 수석대표는 전공한 외교관으로서 핵담판 경험이 나보다도 낫다. 그래서 나는 사업에 더욱 노력하는가 하면 그와 담판하기전에는 준비작업을 잘하기 위해 힘쓴다"고 했다.
평양주재 기자인 나는 몇차례의 6자회담 보도에 참가, 김계관부상이 북경에 갈때마다 공항에 나가 그를 '바래주군 했다.' 조선대표단은 외국기자들의 질문에 대답하는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김계관부상 역시 처음에는 그러했다. 그러나 시간이 감에 따라 그는 공항에서 나를 만나기만 하면 얼굴에 미소를 지으면서 인사를 건네였으며 기자들의 사업정신을 칭찬했다.
/국제선구도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