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의 연극은 젊은 연극인들이 약진하는 가운데 기업형 대형연극이 관객 몰이에 나섰고, ‘저질연극’의 시비도 있었다. 1997년에는 한국 연극계가 세계화를 향한 첫발을 내디뎠다. 뮤지컬 〈명성황후〉가 미국 뉴욕의 브로드웨이에서 공연되었으며, 세계연극제가 26개 국 47개 팀의 참여 아래 1997년 9월 1일부터 45일 동안 113편의 작품으로 개최되었던 것이다.
〔영 화〕
광복 직후 광복영화들이 많이 나왔고 당시 좌·우익의 사상적 혼란과 분단의 고착이라는 사회적 상황과 관련, 반공영화가 나오기도 하였다. 정부수립 이후 〈파시波市〉·〈마음의 고향〉 등 비교적 예술성이 높은 본격적인 작품이 나왔으며, 6·25전쟁의 와중에서도 영화인들은 〈태양의 거리〉·〈낙동강〉·〈고향의 등불〉 등을 제작하였고, 신상옥(申相玉)은 〈출격명령〉 등의 전쟁영화를 만들어내었다.
195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는 관객층의 대폭적인 증가, 제작편수의 증가, 작품수준의 향상, 경향의 다양화, 영화인의 세대교체 등의 현상을 보이면서 중흥기를 맞게 되었다. 이규환(李圭煥)의 〈춘향전〉은 이러한 현상의 출발점이었으며, 이병일(李炳逸)의 풍자희극 〈시집가는 날〉은 한국영화로서는 최초로 국제영화제라고 할 수 있는 제3회 아시아영화제에서 희극상을 받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