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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원에 벼를 심은 선광의 마을
//hljxinwen.dbw.cn  2018-02-09 10:21:00

베이징 김호림 특별기고

  (흑룡강신문=하얼빈)뜻풀이를 하면 선광(鮮光)은 조선족 마을의 빛나는 영광이라는 의미이다. 너와 나의 소원을 담은 이 이름이 하도 좋아서일지 모른다. 선광은 대륙 동부의 여러 지역에 동명의 촌락으로 나타나고 있다.

  김원철(金元哲)은 내몽고 선광촌의 토박이지만 그렇다고 선광촌의 태생은 아니다. 시초에는 요녕성(遼寧省) 창도현(昌圖縣)에서 살다가 산 너머 통료현(通遼縣) 청하공사(淸河公社) 해사력(海舍力, 몽골어의 음역으로 깊고 큰 강을 의미) 마을에 이사를 했다고 한다.

통료시 선광촌의 일각.

  뒷이야기이지만, 이 해사력 마을의 주민들이 동쪽으로 집단이주하여 새 마을의 선광을 만든다.

  "아버지의 친구가 잘사는 고장이라고 자랑해서 내몽고에 왔는데요… 다시는 옛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했지요."

  사실상 김원철 가족의 옛 고향은 요녕성의 창도가 아니다. 두 세대에 걸쳐 여러 번이나 이사를 반복했다. 산 너머 멀리의 강 저쪽에 옛 고향이 있었다. 부친 김재진(金在鎭, 사망)은 워낙 경상북도 대구에서 살았다고 한다. 김재진은 21살 때 형과 함께 둘이서 압록강을 건넜다. '노구교(盧溝橋) 사변'으로 중국과 일본의 전면전이 개시된 1937년 그 해였다. 시끌벅적한 판국이었지만 만주에 가면 배불리 먹고 잘 살 수 있다는 말에 귀가 솔깃했다. 나중에 김재진이 형과 함께 행장을 풀어놓은 곳은 요녕성 북부의 개원(開原)이었다. 개원은 원(元)나라 때 흑룡강(黑龍江)에 설치한 개원(開元) 만호부(萬戶府)에서 이름이 나타나는데, 명(明)나라 때 남쪽으로 자리를 옮겨 현재의 지역에 '정착'하였다고 한다. 개원에 정착한 후 김재진은 현지의 조선인 처녀와 결혼, 미구에 4남2녀를 슬하에 둔다. 그러고 보면 개원은 김씨 가족의 마음의 또 하나의 옛 고향으로 되고 있었다.

  개원 역시 그 지명이 움직이고 바뀌듯 잠깐 들리는 고장으로 되고 있었다. 김재진은 얼마 후 창도에 이사했다. 창도는 개원의 북쪽으로 30여 ㎞ 떨어져 있다.

 1970년대 마을의 벼 실험장에 있는 기술원 김원철(왼쪽 첫번째 인물).

  "일본인이 창도에 농장을 만들었는데요, 조선인만 해도 1천 가구 되었다고 합니다."

  창도의 이 농장은 지금도 다른 이름으로 존속하고 있지만, 물이 부족해서 논농사를 하지 않은지 오래다. 농장에 살던 조선인들도 오래 전에 벌써 산지사방으로 흩어졌다.

  농장의 조선인 마을 해체는 창도의 지명에서 미리 예견된 듯하다. 창도는 옛날에는 유목지역이었다. '푸른 초원'이라는 의미의 몽골어 이름이 중국말로 변음 된 게 '창도'이다. 지명처럼 창도는 풀이 무성하게 자라도 벼를 심고 키우기가 어려운 고장인 듯 했다.

  김재진은 일가족을 데리고 창도를 떠났다. 셋째인 김원철이 네 살을 잡던 1954년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이 이번에 선택한 통료도 예전에는 광활한 목장이었다고 한다. 청(淸)나라 때는 친왕의 영지였다. 민국(民國) 원년(1912), 제15대 탁리극도(卓里克圖) 친왕이 영지에 개간자를 모집하면서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통료는 이때 생긴 지명이라고 한다. 유명한 요하(遼河) 지역으로 사통발달 통하는 곳이라는 것. 요하는 통료의 중부를 흐르는 강이며, 실제 이 지역에서 어디로나 쉽게 통할 수 있다.

  해사력 마을에는 일찍 1941년부터 곳곳에서 농부들이 소문을 듣고 모이고 있었다. 물을 따라 마을을 이루고 농사를 짓는 조선인들이었다. 청하공사에는 청하수(淸河水)라고 불리는 큰 강이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청하공사의 해사력 마을은 김재진 일가가 이사할 즈음 150가구의 큰 동네를 이루고 있었다.

셋째 김원철 부부의 환갑잔치에 모인 김씨네 일가족.

  그런데 마치 그 무슨 업보를 쌓고 반복하고 있는 것 같았다. 청하에 1958년부터 땜을 만들면서 물이 줄었다. 보를 만들었지만 그 식이 장식이었다. 1960년 6월 해사력 마을의 사람들은 동쪽으로 200여리 떨어진 통료현 대림공사(大林公社)의 허허벌판에 이삿짐을 내려놓았다. 요하의 지류인 규래하(叫來河)가 대림공사를 흘러 지나고 있었다. 규래하가 그 이름처럼 부른 해사력 마을의 이사행렬은 이듬해까지 이어졌다. 조선족들이 자리를 뜬 해사력 마을은 몽골족이 다시 자리를 메우며 그때부터 해사력까차(嘎査, 몽골어의 음역으로 마을이라는 의미)라고 불렸다고 한다.

  대림공사는 여러 마을에서 각기 땅을 떼어 새 마을을 만들었다. 집체소유제 의 농촌의 인민공사(1953-1983) 시기라서 토지 등 생산수단의 분여는 모두 정부적인 통일적인 관리에 따라 분배와 배치가 쉬웠다. 선광의 마을은 그렇게 땅위에 불쑥 나타났다.

  김원철의 기억에 떠오르고 있는 옛 마을은 '마구간'의 모둠이었다. 초원의 들에는 투피도 아닌 맨 흙으로 쌓은 집이 일어서고 있었다. 집 한 채가 여섯 칸, 한 칸에 2가구가 함께 거주했다. 8채의 약 100가구의 인가가 말떼처럼 문득 벌판에 나타났다. 이 최초의 선광 마을은 한때 160가구로 엄청 늘어났다고 한다.

  '선광'과 함께 김원철의 머리에는 지도에 없는 지명 하나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어른들은 이웃한 일부 마을을 '도둑놈의 굴'이라고 부르던데요."

  선광의 주변은 주로 몽골족이 사는 마을이었다. 그들과 알력이 있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빈궁한 고장이라서 그들 일부 촌민들은 뭔가 눈에 보이면 싹쓸이로 쥐어갔다고 한다. 하긴 통료 지역에서 선광이라고 하면 모두 엄지손가락을 내밀고 있었다. 농사를 잘하고 사람이 잘 산다는 것이었다.

1980년 마을의 중학교 졸업기념사진, 교원이 12명이고 학생이 10명이다.

  "그때는 공수(工値)를 기입했는데요, 한 공(수)에 30전 하다가 1970년대에는 80전, 90전으로 올라갔어요."

  그 무렵 계란 하나에 7,8전이었다. 뒤주의 쌀독을 채울 수 있었고 구들의 밥상에 여유가 있었다. 빈곤이 공존하던 시대의 상대적인 부유함이었다.

  마치 산 너머 또 초원이 반복하듯 했다. 선광 마을은 내몽고에 또 하나 등장한다. 동쪽의 흥안맹(興安盟)에 출현한 이 동명의 마을도 비슷한 이야기를 엮고 있었다. 1919년, 심씨(沈氏) 등 경상도 이주민들이 물을 찾아 작륵하(綽勒河)의 기슭에 논을 개간했다. 1956년, 그들은 이웃한 몽골족과 함께 (민족)연합대대를 설립하였다. 그해 논과 밭 수확량의 차이가 큰 탓에 배분을 두고 서로 모순이 생겼다. 그리하여 조선족으로 구성된 선광대대를 새로 설립하기에 이른다. 이 대대가 미구에 일명 선광까차(嘎査)의 선광툰(屯)으로 거듭난 것이다.

통료시 선광촌의 조선족학교는 오래전에 폐교, 다른 용도로 바뀌고 있다.

  다른 조선인(족) 마을도 지명이 다를 뿐 서로 비슷한 중복을 하고 있었다. 모두 동북 3성을 경유하거나 직접적으로 육속 내몽고에 진출하였다. 벼농사에 적합한 물을 찾아 논을 개척하고 강기슭에 한데 모여 마을을 이뤘다. 그들은 강을 따라 동부의 흥안맹(興安盟), 후룬벨맹(呼倫貝爾盟), 절리무맹(哲里木盟), 적봉시(赤峰市) 등 3개 맹과 시에 집거하였다. "동부에 집거하고 서부에 흩어져 살며 전 구역에 분포"한 이런 특점은 내몽고조선족연구회가 편찬한 지방지 '《내몽고조선족'에 여실히 반영된다. 참고로 내몽고의 도시에 거주하고 있는 조선족은 거개 1950년대 변강 지원건설로 기업 전근이거나 복원 군인, 학교 졸업생 그리고 친척을 따른 가족들이다. 궁극적으로 내몽고의 조선족은 무려 1만 8천명에 달하는 것으로 전국 인구전면조사(2010)에 의해 밝혀지고 있다.

  아닌 게 아니라 조선인(족)들은 마치 물만 있으면 초원이라도 아무데나 자라고 또 갓털처럼 쉽게 날려가 땅속에 깊이 뿌리를 박으며 왕성하게 꽃을 피우는 민들레꽃을 상기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민들레도 시와 때에 따라 꽃을 피운다. 선광의 사람들이 배를 불린 것은 나중에 생긴 꿈같은 이야기였다. 김원철 가족이 이웃과 함께 집단이민을 하던 1960년대 초, 대륙은 '3년 재해'로 경제난에 빠졌다. 이 무렵 인민공사(人民公社)는 마을에 공동식당을 운영하고 있었다. 촌민들은 재래의 부뚜막을 버리고 명실상부한 '큰 가마 밥'을 먹었다.

  "사원(社員)은 식당에서 밥을 먹었지만요, 아이들은 집에 남아서 밥을 먹어야 했지요."

  김원철은 그의 밥그릇에 구슬픈 옛 기억을 담고 있었다. 말이 밥이지 강낭이(옥수수)로 만든 푸성귀 따위의 떡이었다. 쌀은 대부분 징구량(征購糧, 국가에 바치는 양식)으로 상납했으니, 남은 양식으로 때를 에워야 했던 것이다. 미구에 식당마저 끼니가 떨어지고 있었다. 집에 오도카니 남은 아이들은 날마다 겨우 한 공기의 끼니만 차려졌다. 그마저 밥공기에는 풀이 반을 넘었다.

  "엄마가 식당에서 먹을 걸 옷에 감춰갔고 오면 그걸 얻어먹고 주린 배를 달랬지요." 김원철의 굶주린 이 기억은 1960년대의 오랫동안을 이어지고 있었다.

선광촌에서 만난 부엌의 일부.

  거의 집집마다 푸성귀도 없어서 볏겨로 떡을 만들어 먹던 이야기도 이즈음에 생겼다고 한다. 기름이 없어서 물을 넣어 덩어리를 만든 후 솥에 놓아 앞뒤로 구워 떡 모양을 이루게 했다. 그걸 먹으면 뒤를 보는 게 죽도록 힘들었지만, 힘들다고 먹지 않으면 배가 죽도록 고팠다.

  "정말 말도 못해요, 그때는 사람마다 죽지 못해 산거지요."

  김원철은 그때 그 시절의 이야기를 맹물을 마시듯 덤덤하게 밥상에 흘렸다. 이른 저녁이었지만 그들 부부는 벌써 이날의 저녁끼니를 때우고 있었다. 해가 늦게 뜨고 일찍 지는 겨울이라서 하루 두 끼니의 식사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선광촌에 생활이 펴이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말부터였다. 이때부터 촌민들은 '투피'로 가옥을 만들면서 하나둘씩 흙집을 떠났다. '투피'는 흙벽돌의 방언인데 흙과 짚을 배합하여 물로 반죽한 후 틀을 들어내어 각자 원하는 모양의 벽돌을 만들어낸다.

  1968년, 선광 마을에 처음으로 전기가 들어왔다. 이웃 마을에서는 아직도 구들 목에 촛불을 켜거나 밥상에 기름등잔을 얹고 있었다.

  "통료에서 우리가 유일하게 벼농사를 하고 있었는데요. 정부에서는 조선족이라고 우리 마을에 늘 우대를 해줬어요."

  정작 생활이 꽃을 피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초부터였다. 이때 중국에서는 일명 '도거리'라고 하는 가정연대책임제(家庭聯産承包制)가 실시되었다. 정보당 3톤 정도 나오던 벼가 6톤 남짓이 곱으로 쏟아졌다. 짚으로 발을 만드는 등 거의 집집마다 부업을 했다. 큰돈은 아니었지만 차츰 돈이 주머니를 채우고 있었다.

  웬 일인지 지긋지긋한 윤회는 기어이 강물에 흘러가지 않고 있었다. 근처에 저수지를 설치하면서 강이 또 말랐다. 물이 없으면 벼를 심을 수 없었고 땅의 주인은 또 자리를 떠야 했다. 정부에서 150만원의 거금을 투자하여 마을에 기계우물을 팠다. 그 무렵 김원철은 마을의 1인자인 공산당 지부서기로 있으면서 그 누구보다도 마을의 이모저모를 낱낱이 읽고 있었다.

  "그때 우물을 마흔 두 개 팠는데요, 우물의 깊이가 45m나 되었습니다."

  어디나 물이 말랐고 누구나 갈증에 시달렸다. 그 기회를 편승했던지 도시바람은 초원에 더구나 힘차게 불어오는 듯 했다. 누군가는 도시로 떠났고 또 누군가는 한국으로 떠났다. 나중에 해마다 마을에 부쳐오는 돈은 쌀값까지 합쳐 인민폐 천만 원의 선위에 올라섰다. 선광은 원근에 이름난 부유한 마을로 되었다. 옛날에 마을이 잘 살았다는 건 그 무슨 허풍처럼 들리고 있었다.

  실제로 허풍처럼 들리는 이야기는 우물을 파고 있었다. 마을의 우물은 어느덧 100m의 깊은 땅속에 이르고 있었다. 아니면 땅에서 물이 나오지 않는단다.

  언제인가부터 동네에 인기척이 부쩍 줄기 시작했다. 빈자리는 타지의 한족이 들어와서 채웠다. 마을의 조선족은 40여 가구, 다 합쳐야 90가구 정도이다. 옛날 벼를 심던 논은 거개 옥수수를 심는 밭으로 되고 있었다. 벼농사를 하고 있는 조선족으로는 김씨 성의 촌 간부가 홀로라고 한다. 마을에 있던 조선족 중학교는 1997년에 들의 강물처럼 말라버렸고 조선족 소학교도 2010년에 마을의 옥수수 밭처럼 엉뚱한 탈바꿈을 했다.

  마을을 떠난 그 사람들은 다시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김원철의 두 자식도 또 다른 '고향'의 사람으로 되고 있었다. 하나는 한국에서 일하고 다른 하나는 큰 도시 천진(天津)에 회사를 차리고 있단다.

  "인제 설이면 선광에 와요. 엄마, 아빠를 만나러 오는 거지요."

  선광의 자식들이 마을을 찾아오는 유일한 이유였다. 김원철의 말 그대로 그의 이 세대가 사라지게 되면 조선족 영광의 선광 마을도 더불어 소실된다. 그런데 기존의 마을 토박이는 점점 눈뜨게 줄어들고 있단다.

  이야기를 들을수록 목이 바싹 말랐다. 부엌에 내려가서 바가지에 물을 철철 담았다. 부지중 물위에다 선광을 떠난 그 사람들을 풀잎처럼 떠올렸다. 정말이지 그들은 또 어디에 가서 물을 찾아 '벼'를 심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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