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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곤의 다리 저쪽의 탑 마을
//hljxinwen.dbw.cn  2018-02-02 09:13:37

  베이징 김호림 특별기고

  (흑룡강신문=하얼빈)마을의 이름 자체가 무덤으로 불리고 있었다. 고력묘자(高力墓子)는 실은 중국말 동음의 고려무덤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그렇다고 해서 마을 사람들이 이 '고려무덤'의 능참봉인 건 아니었다.

마을 어귀에 있는 건곤의 다리.

  마을의 공식 이름은 환인현(桓仁縣) 화래진(華來鎭) 광복촌(光復村) 9소조였다. 마을 어귀에서 만난 홍명도(洪明道, 1965년 출생)는 동네에 인가라곤 별로 없다고 말한다.

  "조금 더 들어가면 몇 가구 보일 건데요, 그게 전부이지요."

  고려무덤 마을에서 조선족으로는 홍명도 부부가 유일했다. 그들은 마치 그 무슨 파수꾼처럼 골짜기의 어귀에 집을 잡고 있었다. 자의든 타의이든 막론하고 고려무덤의 명실상부한 1번지로 되고 있는 것이다.

  고려무덤은 환인 현성에서 서쪽으로 30㎞ 가량 떨어진 산골짜기에 위치한다. 택시기사가 이 마을을 쉽게 찾은 것은 '고려무덤'이라는 지명이 너무 익숙했기 때문이다. 참고로 고려무덤은 환인에 1,760여기의 10여개 군체를 이루는 걸로 관방 전면조사에 의해 확인되고 있다. 고려무덤(高麗墓子)을 비롯하여 고려가(高麗街), 고려구(高麗溝), 고려망(高麗望) 등 고려인(조선인)이 살면서 형성된 자연부락과 산골짜기는 환인의 여러 곳에 널려 있다.

민속원에서 나란히 포즈를 취한 홍명도와 선우일숙 부부.

  환인은 랴오닝성(遼寧省) 나아가 대륙에서 근대의 조선족 이주사가 시작된 지역이다. '환인현조선족지(桓仁縣朝鮮族志'에 따르면 일찍 18세기 말 조선인이 환인 지역에 진출했다. 그때는 청나라 정부가 17세기부터 동북지역에 '봉금(封禁)' 정책을 실시하면서 통제가 심했다. 조선 평안북도(平安北道)의 선원 계준범(桂俊範)이 기름진 땅을 탐내어 환인 경내에 남몰래 강을 건넜다. 계씨는 그해 낟알 10석을 얻게 되자 계속 경작하다가 생활이 펴인 후 조선으로 돌아갔다. 19세기 초, 계준범의 아들이 다시 환인에 와서 농사를 짓다가 조선으로 돌아갔으며 이어 손자도 환인에 와서 경작했다고 한다. 계씨는 증손자인 계훈건(桂勛建)에 이르러 환인에 정착하였다. 광서(光緖) 33년(1907), 환인의 조선족은 무려 514가구의 2,006명에 이르렀다고 '환인현지(桓仁縣志)'가 밝힌다. 인구의 집중은 촌락을 이루며 조선인의 촌락은 벼농사와 이어진다. 광서 원년(1875), 조선인들은 환인에서 처음으로 벼를 심고 있었다고 괴마자진(拐磨子鎭) 와니전자(渦泥甸子)의 석비가 기록하고 있다.

  광복촌은 이 석비의 남쪽으로 불과 10여리 떨어진 이웃 마을이다. 그러나 조선족 집성촌인 와니전자와 달리 인구가 흥성하던 1985년에도 조선족은 겨우 9가구, 44명만 살고 있었다. 이 무렵 환인현에 살고 있는 조선족은 공화국 초기의 1953년보다 2천 명 정도 줄어든 8,005명이었다고 '환인현조선족지'가 발표하고 있다. 환인은 벽지의 시골이라고 하면서 사람들은 재간이 있고 기회만 생기면 벌로, 도시로 떠났다. 동북 3성의 각 지역에는 부동한 시기 환인에서 이주한 조선족(인)을 찾아볼 수 있다. 환인은 달이 갈수록 인구가 늘어났지만 조선족의 비중은 해가 갈수록 줄어들었다.

민속원에서 나란히 포즈를 취한 홍명도와 선우일숙 부부.

  사실상 홍명도 부부도 환인 태생이었지만 한때는 성 소재지 심양(沈陽)에서 살았다. 나중에 그들이 환인에 돌아와 심산의 '고려무덤'에 거처를 잡은 것은 남다른 원인이 있었다. 홍명도의 말을 빈다면 정말로 조상의 무덤이 있었기 때문이다.

  "장모님과 부친, 장인, 모친이 연이어 세상을 떴는데요, 각기 3년씩 산에서 산소를 지켰지요.

  3년상(三年喪)은 부모의 은혜에 3년 동안 감사하는 풍속이다. 삼국시기에 이미 있었지만 실제로 3년째 되는 날까지 상복을 입고 상을 치르는 데서 유래한다.

  양부모의 거상(居喪)을 마치고 나니 어언 12년 세월이 흘러갔다. 궁극적으로 삶의 '도(道)'를 깨쳤다고 홍명도가 말한다. "산에서 살면서 산의 가르침을 읽었습니다. 뭐나 내게 아니었지요."

  홍명도 부부는 랴오닝성 선양의 일상을 정리하고 산에서 살기로 작심했다. 거상이 끝났지만 이번에는 아예 '고려무덤'의 '능참봉'으로 되기로 한 것이다.

  실제로 진실한 고려무덤은 바로 그들 부부가 초가를 지었던 소남산(小南山)의 골짜기에 있다. 이 무덤의 옛 주인은 천 년 전에 이곳에서 살았던 고(구)려의 선인(先人)이다. 그들은 이 지역에 '무덤'이나 '집'뿐이 아닌 도읍을 만들었다. '환인(桓仁)'은 고구려의 도읍지이며 또 발해국의 환주(桓州) 영역이다. 공교롭게 단군(檀君)의 할아버지 이름도 동명의 환인(桓因)이다.

  각설하고, 주몽(朱蒙)은 천제 해모수(解慕漱)의 아들로서 동부여(東夫餘) 왕 금와(金蛙)의 궁궐에서 자랐다. 그는 금와의 아들들과 불화하자 마침내 졸본(卒本)에 이르러 비류수(沸流水) 위에 집을 짓고 국호를 고구려라고 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의 '기이편(奇異篇)'의 기록이다. 그때가 서기전 37년이었다. 비류수는 오늘의 혼강(渾江)이며 주몽이 집을 짓은 곳은 오늘의 오녀산성(五女山城)이라고 한다. 오녀산성은 흘승골성(紇升骨城) 혹은 졸본성(卒本城)이라고 부른다. 오녀산성은 1986년 처음 발굴했는데 고구려 때부터 시작되는 다수의 역사문물이 출토되었다.

  해와 달이 바뀌었다. 고구려가 소실되었고 발해국이 멸망했다. 명(明)나라 영락(永樂) 22년(1424), 건주(建州) 여진의 제3대 수령 이만주(李滿柱)가 군대를 인솔하여 오녀산성에 주둔하였다. 이때부터 환인은 줄곧 여진의 활동 지역으로 되었으며 토박이의 민족으로 자리매김을 하고 종국적으로 환인만족자치현으로 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기억은 어쩔 수 없이 잊힌다. 홍명도는 선조가 언제 또 왜서 환인으로 이주했는지는 기억이 없었다. 그럴지라도 그의 선조가 대개 압록강 저쪽의 이민이라고 쉽게 단정을 내릴 수 있다고 한다. 《환인현조선족지》에 따르면 옛날 환인에 이주한 조선인은 분명 열에 여덟은 평안도 사람들이었으며 그 다음으로 경상도 사람들이었다. 말 그대로 평안도와 경상도에서 압록강만 건너면 만나는 십승지지(十勝之地), 즉 신명(神明)이 강림하니 환란을 피할 수 있다는 산간의 환인이었다.

민속원의 상징물인 맷돌의 탑.

  아내 선우일숙(鮮于日淑, 1964년 출생)의 기억에 남는 것은 십승지지의 그런 현묘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가족이나 선조 하면 맨 먼저 그녀의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언제나 눈앞에 뱅글뱅글 돌던 둥글넓적한 맷돌이었다. 맷돌의 어처구니를 돌려 맨날 맷돌처럼 바삐 돌아치던 할머니의 모습이 시야에 춤추고 있었다.

  "옥수수를 한 소쿠리 갈아야 그날의 밥공기를 채울 수 있었지요. 맷돌을 돌리지 않으면 그날은 배를 굶어야 했거든요."

  맷돌은 곧 음식이었고 할머니 그 자체였다. 맷돌에 감사했고 할머니에게 감사했다. 선우일숙은 장차 커서 돈을 벌면 꼭 맷돌을 사겠다고 다짐을 했다.

  강물은 그냥 바다로 흘러갔지만 세상이 바뀌고 인생이 변하고 있었다. 할머니가 애지중지하던 맷돌은 마을의 어느 모퉁이에 나뒹굴고 있었다. 집의 일부이던 장독도 어느 밭머리에 버려지고 있었다.

  선우일숙은 맷돌을 보면 흰 머리의 할머니가 생각났고 장독을 보면 올망졸망한 식구를 머리에 떠올렸다. "다들 집들이를 하면서 옛 물건을 쉽게 버리고 있었지요. 가보를 잃는 것처럼 너무 아까웠어요."

  살아가는 세속은 할머니를 버리고 있었고 민속을 던지고 있었으며 역사를 잃고 있었다.

  민속 기물의 수집은 이때부터 본격 시작되었다. 그게 1994년이었다. 홍명도 부부가 사업을 벌이고 있던 심양은 이 무렵 가옥의 철거와 이주가 전면 시행되고 있었다. 심양에서 시작된 수집 작업은 급기야 이웃한 철령(鐵嶺), 무순(撫順), 안산(鞍山)으로 파급되었다. 미구에 그들의 발길은 장백현(長白縣), 단동(丹東) 등 요녕성의 변두리 지역까지 미쳤다. 이때 부부는 에피소드를 늘 짐차에 기물처럼 실었다고 한다. 가옥철거를 뒤따르는 쓰레기의 수거자로 자주 오인되었던 것.

힘들게 수집한 베틀짜기 기물과 함께 있는 홍명도.

  "우린 몇 년 동안 사업해서 모은 돈을 거의 다 옛 기물의 수집에 넣었습니다."

  그래도 수집 작업이 너무 늦었다고 홍명도가 아쉬워했다. 많은 유물은 이에 앞서 컨테이너로 실려 한국에 자리를 옮겼다고 한다. 그때 항간에서는 아직 민속 기물도 문물이라는 걸 잘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나중에 홍명도는 일부 유물을 더는 수집하기 힘들어서 일부러 한국에서 사오기도 했다.

  어느 날인가 스스로 놀랄 정도로 옛 기물이 산더미를 이루고 있었다. 맷돌만 해도 3천개가 되었고 장독만 해도 3백여 개나 되었다. 찬장, 농짝으로부터 자물쇠, 숟가락에 이르기까지 8천 여 점의 기물이 모였다. 기물의 순간순간들이 농축된 민속의 대화를 하나하나 속삭이고 있었다. 더는 단순한 소장품이 아닌 생생한 역사의 기록물이었다.

  '구슬은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이다. 2007년 전부터 홍명도 부부는 민속문화원을 만들려고 작심했다. 조선족 민속의 내용을 체계화하고 소개할 필요를 갖게 된 것. 산기슭의 언저리에 건물을 지었고 산중턱에 건물을 보수했다. 수집한 옛 기물들은 저마다 자리를 찾았다. 기물은 퍼즐처럼 서로 맞추고 한데 묶여 조선족 생활의 합체를 그리고 있었다.

  우리 일행은 동네 언저리의 산기슭을 흐르는 냇가를 지났다. 맷돌이 다리위에 난간처럼 줄줄이 걸려 있었다. 길을 안내한 홍명도는 그 다리를 '건곤(乾坤)의 다리'라고 작명했다고 말한다. 그의 말처럼 이 다리를 지나면 정말로 하늘과 땅의 연화(蓮花)세계가 펼쳐질까…

  냇물은 왼쪽의 깊은 골짜기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 골짜기에 바로 동네 이름을 만든 고려무덤이 있다고 한다. 고려무덤의 시초는 본래 여기서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골짜기는 더는 고려무덤의 '고려구(高麗溝)'가 아니었다. 1958년 무렵 극좌적인 대약진(大躍進) 운동에서 무덤들이 파괴되었다고 한다. 고려무덤이 없는 골짜기는 인제는 차씨(車氏)가 한때 살았다고 하는 '차가구(車家溝)'라고 불리고 있었다.

  비탈을 오르다가 잠깐 걸음을 멈췄다. 일부러 깎아 세운 바위가 길가에 안내표식처럼 서있었다. 뿌리를 찾는다는 뜻의 글 '심근(尋根)'이 바위에 음각되어 있었다. 조상을 모시고 뿌리를 지키며 민속의 뿌리를 찾고 역사를 재현한다는 것.

  이 산비탈에 홍명도 부부의 양부모 산소가 있었다. 그래서 홍명도 부부는 처음에는 이곳에 초가를 짓고 솥을 앉혔다고 한다. 전기가 없고 물이 없었다. 간간이 멧돼지가 숲에서 어슬렁거렸다. 힘들었지만 부부는 항상 마음이 즐거웠다고 한다. 산은 인삼처럼 자연의 '기'로 넘치고 있었다. 장인이 왜서 그토록 산을 즐겼는지 인제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광복촌의 간부였던 장인은 이 산에 인삼을 길렀었다. 장인은 그렇게 산의 기를 길렀고 산의 기를 접했으며 산의 몸에 그의 마지막 거처를 잡았다.

  산정에 홍명도 부부는 일부러 석탑을 세웠다. 한 쌍의 석탑은 정겨운 부부처럼 어깨를 나란히 서있다. 홍명도 부부는 이 석탑을 특별히 '일월탑(日月塔)'이라고 명명했다고 한다. 무슨 유물이든지 세월이 흐르면 닳고 떨어져 기억에서 소실될 수 있다. 그러나 가족과 가족이 살던 마을 나아가 가족이 속한 민족은 해와 달과 더불어 소도(蘇塗)처럼 소중히 간직해야 한다는 것.

환인에 있는 고구려의 도성 오녀산성.

  탑의 소문이 한입 건너 두입 전하면서 산에는 방문자가 하나둘씩 나타나고 있었다. 인제는 날마다 이름 모를 누군가가 건곤의 그 다리를 건너고 있다고 한다. 탑의 민속마을은 그들에게 별다른 '고려무덤'을 펼치고 있었다.

  문득 일행 중 누군가 하나의 작은 발견을 했다. "맷돌은 참 많은데요, 뭐나 다 어처구니가 없네요."

  '어처구니'는 맷돌을 돌리는 손잡이를 말한다. 민속원의 크고 작은 맷돌은 하나 같이 어처구니가 없었다. 어처구니가 없으면 맷돌을 절대로 사용할 수가 없다.

  그러고 보니 고려무덤 민속원의 전승을 받을 '손잡이'의 사람이 없다는 말로 들리고 있었다. 민속원을 이어 또 양생원(養生園)을 만들고 있는 홍명도 부부의 마음을 어느 정도 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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