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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1번지, 행복한 만융의 이야기
//hljxinwen.dbw.cn  2018-01-11 16:57:00

베이징 김호림 특별기고

  (흑룡강신문=하얼빈)촌장이 첫손에 꼽는 마을의 자랑거리는 솔직히 뜻밖의 이야기였다. "그때 큰물이 졌는데요, 우리 마을에만 물이 들어오지 않았지요."

  1995년 여름, 혼하(渾河)에 100년 만의 큰물이 졌다. 요녕성(遼寧省)의 소재지 심양(沈陽) 부근에는 무려 열대여섯 곳의 언제가 터졌다. 혼하와 1킬로 정도 떨어진 만융(滿融)은 흡사 물의 세계에 떠있는 외로운 섬을 방불케 했다.

중국 조선족의 제1의 마을 만융의 거리 일각.

  옥문산(玉文山, 1959년 출생)이 아직 촌장으로 부임하기 전에 생긴 일이다. 옥문산의 부친은 일찍 1947년 만융에 이주했다고 한다. 원래 살던 고장은 만융의 동북쪽으로 150여킬로 떨어진 신빈(新賓)이었다. 신빈은 산지사방에서 손님이 모여들고 있는 양상이라고 해서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옛날 산지사방의 조선인들이 일부러 만융을 찾은 이유가 있었다. 조선인들이 사는 곳에는 벼가 자랐고, 벼가 자라는 곳에는 조선인들이 살고 있었다. 조선인들은 물을 따라 땅에 볍씨를 뿌렸다. 강이 멀면 물길을 빼서 논을 풀었다. 심양 북쪽의 명소인 남북운하도 20세기 초 조선인이 만든 수로공사이다.

  혼하는 요녕성의 가장 큰 내하로, 강 양안에 기름진 땅을 만들고 있었다. 1934년, 이 고장에 첫 보습을 박은 이주민들은 나중에 농업 등 백업(百業)이 가득차고 즐거움이 융합하라는 축복을 담아 만융이라는 이름을 만든다.

  실제로 만융은 지명처럼 미구에 만인의 축복을 받는 마을로 되었다. 한때는 외국인들이 견학하는 고장으로 되었다. 혼하의 기슭에 금빛 파도를 넘실거리는 일망무제한 논은 파란 눈들의 경탄을 자아냈다.

옥문산 촌장이 부감도에서 인터뷰 장소의 이치를 가리키고 있다

  "그게 옛말이죠, 지금도 400여 정보의 밭이 있지만 벼농사를 하지 않습니다."

  1995년 무렵부터 벼농사가 옛말로 되었다고 옥문산이 회억했다. 혼하에 큰물이 났었다는 이야기가 누군가의 거짓말처럼 느껴진다. 만융 근처의 대도시 심양도 실은 이 혼하 때문에 생긴 지명이다. 옛날 혼하는 심수(沈水)라고 불렀는데, 심수의 남쪽에 있는 고장이라고 해서 심양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산은 남쪽이 볕 양(陽)이고 북쪽이 응달 음(陰)이라고 말하지만 강은 남쪽이 음이며 북쪽은 양을 가리킨다.

  혼하의 의미도 음과 양처럼 앞뒤가 뒤바뀌고 있는 듯하다. 지명은 분명히 물이 흐린 강이라는 뜻이지만 강은 늘 하늘처럼 청청 푸르다. 전설로 인해 생긴 이상한 지명이라고 전한다. 옛날 청(淸)나라 태조 누르하치(努爾哈赤, 1559~1626)가 고의로 물을 흐려놓았다고 한다. 명(明)나라 말년, 누르하치가 세운 청나라의 전신 후금(後金, 1616~1636)은 명나라 군대의 공격을 받는다. 명나라 대장 이성량(李成粱)은 20만 대군을 인솔하여 진공하며, 이때 단지 수만 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있던 누르하치는 곤경에 빠진다. 나중에 누르하치는 꾀를 내서 군마를 모조리 강에 쫓으며 또 민가의 말똥을 강에 처넣어 강을 혼탁하게 만들었다. 말똥이 흐르는 더러운 물은 마치 천군만마가 강을 지난 듯 했다. 얼마 후 강에 도착한 이성량은 이를 보자 누르하치의 거짓 대군에 포위될 까봐 급급히 부대를 철수한다. 흐린 물로 명나라 군대를 도망하게 만든 강은 이때부터 '혼하'라고 불렸다고 한다.

  이성량은 후금 개국에 앞서 1615년에 사망했다. 혼하의 전설은 유전되는 항간의 기문일 따름이다. 만융의 벼농사도 혼하의 전설처럼 그렇게 허황한 이야기로 되고 있는 것이다.

만융마을의 특색거리에 위치한 광장, 비오는 날 홍보물이 찢어져있다.

  그런데 정말로 기문이 생기고 있었다. 마을은 비록 벼농사가 사라졌지만 오히려 덩치를 더 불리고 있었다. 눈덩이처럼 시간이 갈수록 커졌으며 종국적으로 중국 조선족마을의 1번지로 불렸다. 공교롭게도 역시 1995년 을해(乙亥)의 그 무렵에 생긴 일이라고 옥문산이 말하고 있었다. 물의 난리와 가뭄을 동시에 터뜨렸던 1995년의 띠 돼지가 마침내 복주머니를 풀었을까…

  "호적 인구로는 지금 조선족만 900가구 정도 되는데요, 예전에는 이사를 오면 호적을 올리고 땅을 줬습니다."

  2천년 초, 만융은 1,600가구, 약 6천 명 인구의 큰 마을로 부쩍 늘어났다. 궁극적으로 3,000가구, 1만 명 인구의 조선족 집성촌을 구축하는 게 목적이었다고 한다. 이 무렵 만융을 다투어 찾았던 사람들은 평안도와 함경도, 경상도의 방언을 한 자리에서 들을 수 있었고, 조선문 간판의 가게, 식당, 공장, 기업을 한 거리에서 만날 수 있었다. 사방에 주민 아파트를 기획, 건설하고 복판에 광장을 만들었으며 상업 환경을 조성하고 근처에 한국 공업단지를 세웠다.

  그 즈음 도시 바람, 한국 바람이 불면서 여느 조선족 마을들이든지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지고 있었다. 이와는 달리 조선족들이 산지사방에서 그 무슨 입구처럼 한데 모여드는 만융은 말 그대로 조선족마을의 1번지로 되고 있었다. '중국 최대의 조선족마을', '조선족 농촌의 희망의 내일'… 등 기사는 만융이 조선족마을의 긍지와 희망을 안고 있다고 신문과 방송에서 눈과 귀를 뜨겁게 달구었다.

만융 조선족마을 입구, 황소와 장구 조각상이 유표한다.

  옛날 심양에서 조선족 하면 서탑(西塔)을 머리에 떠올렸는데, 어느덧 시골의 만융은 시가지의 서탑처럼 인기를 타고 있었다.

  서탑은 만융보다 일찍 조선인들이 나타난 곳이다. 20세기 초, 심양에 천입한 초기 이민자들은 서탑에서 조선인부락을 형성했다. 심양 기차역 등 번화가를 지척에 두면서 식당, 상업이 흥성하였고 이에 따라 조선인(족)들이 대량 집거하면서 현재의 심양 '코리아타운'으로 부상하고 있다.

  그보다 심양 자체는 선인(先人)들의 집단기억에 통한의 '탑'을 세운 고장이다. 후금의 제2대 왕 황태극(皇太極, 1592~1643)이 1627년 1월 조선에 대한 제1차 침공(정묘호란,丁卯胡亂)을 발동하며 이어 1636년 제2차 침공(병자호란,丙子胡亂)을 발동하였다. 조선은 결국 후금에 항복하며 이에 따라 많은 포로가 성경(盛京, 지금의 심양)에 끌려왔다. 와중에는 여인들만 35,000여명에 달했다고 한다. 1648년, 조선은 은 25,000냥을 속전(贖錢)으로 바치고 대신 여인을 포함한 전쟁포로 30,000명을 데려갔다. 조선인 여인들은 오매에도 그리던 고향 땅을 밟게 되었지만, 이미 청나라 병사들에게 몸을 더럽힌 그녀들을 어느 가문도 며느리나 딸로 쉽게 받아주지 않았다. 그때 환고향을 한 여인들을 '환향녀(還鄕女)'라고 불렀는데, 이 이름은 나중에 정조를 잃은 여인들을 칭하는 '화냥년'으로 변했다고 한다. 출가하지 않은 처녀들을 부르던 '가시내'도 실은 그 시절에 생겼다고 전한다. 후금의 병사들에게 붙잡히지 않으려고 처녀들은 남정들처럼 머리에 갓을 쓰고 다녔는데, 이 갓을 쓴 아이가 가스아이, 이어 가시내로 어음변화가 생겼다는 것이다.

  혼강의 물처럼 세월이 흐르면서 만융에도 이런저런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마을의 공업단지는 현재 인근 구역까지 망라하여 심양만융경제구로 승격하였다. 촌민사무위원회의 2층 촌장 집무실에는 심양만융경제구 등 만융의 부감도가 걸려 있었다. 그러나 예전의 한국기업의 호황은 사진처럼 그때 그 시절에 멈춘 듯 했다. 한때 신문과 방송에 소문을 놓았던 양말공장은 한국인 사장이 촌민들에게 거금을 모금한 후 잠적하면서 구설수만 마을에 남겨놓고 있었다. 공업단지에 있던 다른 한국기업도 적지 않게 도산했거나 자리를 옮겼다.

  어찌됐거나 양말공장에 다니던 직원이 300명, 와중에 조선족 직원만 100명 정도 되었다고 하니 공업단지의 그때의 호감을 짐작할 수 있으리라. 현재로서는 한국공장 자체가 많이 줄었고 또 공장에 다니는 조선족도 손가락으로 헤아릴 수 있는 정도라고 한다.

  "동네에 일거리가 있어야 하는 데요… 젊은이들이 마을에 돌아오지 않고 있습니다."

  옥문산의 어딘가 서글픈 이야기이다. 현재로선 농사를 하는 조선족이 없고 또 농사를 할 조선족도 없다고 한다. 잠깐 뜸을 두어 만융노인협회 활동센터에서 만난 협회장 이영수(李永洙, 1953년 출생)도 이와 비슷한 대답을 하고 있었다.

  "현 상황으로 보아서는 우리 마을에 늘어날 사람(조선족)은 더 없을 것 같은데요."

  이영수는 어릴 때 부친을 따라 오상(五常)에서 이주했다고 한다. 흑룡강성(黑龍江省)의 제일 남쪽에 위치한 오상은 벼 재배가 180여년의 역사를 가진다. 청나라 도광(道光) 15년(1835), 조선인이 경내에서 강물을 끌어들여 벼를 재배하기 시작했다고 '오상조선민족지'가 기술한다. 오상은 중국에서 유명한 현급(縣級) 5대 벼 생산 지역의 하나이다.

  남과 북의 똑 같은 곡창이지만 만융은 남다른 우세가 있었다. 이영수는 1995년에 즈음하여 방방곡곡의 조선족들이 하필이면 만융을 찾은 원인을 나름대로 설명했다.

  "우리 만융은 큰 도시(심양)와 가깝고 조선족학교가 있었거든요."

  마을에는 또 1급 병원 등 3개의 병원이 포진하고 있었으며 포장도로가 거리와 골목을 누비고 있었다. 도시화한 마을은 혼하 기슭에 나타난 '꽃피는 세상'을 떠올리게 했다.

  그럴지라도 바다 저쪽의 또 다른 '꽃피는 세상'은 그 이상으로 강렬한 유혹을 하고 있었다. 결국 마을의 개나 소를 내놓고 두발 달린 건 다 한국에 다녀왔다고 옥문산이 말한다. 그 말이 자랑인지 개탄인지 약간 헷갈리고 있었다. 아무튼 마을에 상주하고 있는 사람은 반수 정도, 저마다 돈을 벌려고 마을을 떠나고 또 돈을 벌고 난 후 마을을 떠난다는 것이다.

  "마을에 조선족소학교가 있는데요, 올해의 신입생이 겨우 열대여섯이라고 합니다."

  옥문산이 졸업하던 1970년대 초 만융조선족중심소학교(초등학교)의 졸업생은 670명에 달했다고 밝힌다. 이주민이 대거 진출하던 1995년에도 학급이 14개, 학생이 572명이었다고 심양 '동릉구지(東陵區志)'가 기록한다. 그러나 학교에는 학생이 현재로선 약 80명밖에 되지 않는다고 하니, 인제는 폐교가 어느 날일지를 걱정해야 할 형국이었다.

  결국 마을의 제일 큰 자랑거리는 노인협회라고 이영수 씨가 말한다. "중국에서 마을치곤 제일 큰 협회가 우리 만융에 있을걸요."

  노인협회 회원은 전체 노인들의 반수에 미달하지만 그래도 한때는 360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그뿐만 아니다. 게이트볼의 역사는 20년을 넘으며 좋은 경기 성적으로 심양 지역에서 내내 유명하다고 한다. 이영수는 협회 센터의 활동장소에 즐비한 상장과 기념물, 사진을 연신 자랑했다.

  사실상 만융의 '노인세계'는 10여 년 전에 벌써 윤곽을 나타나고 있었다. 그 무렵 북경의 한 언론사는 만융을 조선족마을의 미래의 희망찬 '모델'로 대서특필하고 있었지만, 실제로 마을에서는 그전부터 벌써 젊은이들이라곤 만나기 힘들었다고 한다. 모름지기 촌민들이 너남 없이 바라던 '꽃피는 세상'은 애초부터 이 같은 '노인세계'는 아니었을 것이다.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한때 만융의 구수한 '청사진'을 기획하던 촌의 어느 관리는 미구에 비리를 저지르는 불명예의 옛 기억으로 마을에 하나의 상처자국을 남겼다.

  그러나 불명예의 또 다른 기억은 개미처럼 계속 마을을 갉고 있었다. 젊은이들이 마을에 돌아오지 않으면서 만융의 고령화 비중이 급격히 커지고 있다고 학자들은 심각하게 지적한다. 이런 추세라면 일명 중국 제일의 마을을 자랑하는 만융은 바야흐로 소실될 위기에 놓인다는 것이다. 참고로 관방 통계수치(인구전면조사, 2010)에 따르면 조선족의 노령화 지수는 133.5%로서 중국 한족(56.6%)의 2.36배, 한국(69.7%)의 1.92배에 달한다.

  "진실한 행복이라면 마을의 어느 기성세대나 순간으로만 그치지 말아야 하겠죠."

  일행은 마을 입구에서 잠깐 걸음을 멈췄다. 대문 양쪽의 황소와 장구를 치는 여인의 동상이 유표했다. 황소의 영각소리와 장구의 가락이 금세 귀에 들릴 듯 했다. 혹시 현실이 아니고 마음에 들린 환청일까… 옛날 착각을 만들었다는 혼강의 전설이 다시 눈앞에 떠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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