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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책 - 동북항일투쟁의 탁월한 지도자
http://hljxinwen.dbw.cn   2009-12-29 09:57:50
 
 

동북전장에서 끝까지 싸우다

1942년 3월 19일 제3로군 총지휘부에서는 김책이 발에 상처가 있어서 악렬한 환경하에 행동하기 불편하므로 우천방에게 김책의 사업을 대체하게 하고 김책은 쏘련에 돌아와 휴식하도록 하였다. 김책은 이에 감사를 표하고 계속 동북에 남아서 투쟁을 견지하겠다고 하였다. 우천방과 같이 온 6명의 대원도 계속 남아서 활동하였다.  

가을이 닥쳐호자 겨울준비를 위해 김책은 소분대에 경찰서나 자위단을 치도록 지시하였다. 3로군 6지대정위 우천방, 12지대 정치부주임 박길송, 지도원 장서린은 3개 소분대를 거느리고 파목동(파언, 목란, 동성)일대에 들어가 군중을 발동하고 유격전을 벌려 선후로 경성의 대라진, 목란의 석두하자와 대귀진, 파언의 4간묘 등지의 경찰서, 촌공소와 자위단을 습격하여 일위군경과 한간들을 호되게 족쳤으며 군중들속에 또다시 항일의 씨앗을 뿌렸다. 이 세개 현에서 14개 항일구국회와 13개 청년의용대를 건립하여 회원이 천여명에 달하고 농민무장대도 600여명에 달했다.

이때 룡남지구의 1호수장으로 불리우는 허형식이 파목동지구의 사업을 검사지도하고 총지휘부밀영으로 돌아오던중 8월 3일 아침 소령하부근에서 200여명 위만산림경찰들에게 포위당해 치렬한 전투를 벌렸다. 그는 적 40여명을 쓸어눕히고 장렬히 희생되였다. 그때 그의 나이는 겨우 33세밖에 안되였다. 동북항일련군 제3로군 총참모장 겸 3로군장이며 북만성위 상무위원인 허형식은 그의 제일 친밀한 전우였다.

김책은 비통한 심정을 누르며 10월상순 경성남산에서 룡남지구 소분대 간부회의를 열고 새로운 유격구를 개척하며 적들을 호되게 타격하도록 지시하였다. 그리고 소분대 34명을 3개 소분대로 다시 편성하였다.

룡남회의후 김책은 류철석, 장향동을 데리고 적들의 정황을 정찰하고 후방량식을 지키면서 계속 항일투쟁을 지휘하였으며 몇개월후 “반일구국회”를 조직하여 군중사업기초를 닦아놓았다. 

1943년 겨울 쏘련 야영에서는 6명 인원을 파견하여 김책을 쏘련으로 데려오게 하였다. 쏘련항일련군 교도려 야영에 돌아온후 김책은 중국공산당동북위원회 위원 겸 동북항일련군 교도려 제3영 정치위원으로 사업했다. 

1945년8월, 항일전쟁의 최후승리를 앞두고 중공동북당위에서는 항일련군의 한족동지들은 중국에 돌아가서 쏘련홍군과 배합하여 동북을 해방하고 조선동지들은 조선으로 나가 조선로동당 건설에 참여하라는 결정을 지었다. 하여 김책은 근 20년간 피땀을 흘리며 싸워오던 북만대지를 떠나 김일성, 최용건 등 300여명 항일장병들과 함께 조선으로 갔다. 조선에 돌아간후 김책은 조선로동당중앙위원휘 정치국위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 부수상을 담임하면서 조선의 건설발전과 국방사업에 모든 심혈을 몰부었다. 

1951년 1월 13일, 그는 아쉽게도 심장병으로 서거하였다.  

/인터넷료녕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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