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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동성조선민족연합회의 주최로 1년에 2회씩 개최되는 광동성 조선족청년 교류의 장인 광동성조선족청년모임. |
주요 연해지역 조선족 이주사
80년대부터 조선족들이 대학졸업 일자리배치, 제대군인 배치, 간부전근 등 형식으로 연해지역에 하나둘 자리잡기 시작, 90년대 들어서서는 산동, 경진(京津), 화동, 광동지역으로 향한 규모화된 이주 양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산동성 연대시 진출 조선족 1세대는 대련수산학원을 졸업하고 연대시 외사판공실 섭외과 과장까지 지냈던 현 연대시조선족노년협회 손익규회장(71세)으로서 1961년 12월 배치 받아 왔으며 그 뒤를 이어 청도나 위해 등지의 해군에 근무하던 퇴역장교출신들이 여럿이 있었다. 1980년대 중, 후반부터 동북3성의 조선족들이 이곳으로 발길을 돌리기 시작, 1989년에 위해로 진출한 위해범진실업유한회사 권주일총경리(흑룡강성 오상시)같은 사람이 이 부류에 속한다. 수도권지역은 1980년대 중반부터 동북3성의 조선족들이 짠지장사, 음식점 운영 등 여러가지 경로를 거쳐 발을 붙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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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이징시조선족 축제의 장 베이징시조선족운동대회 |
상해지역은 1980년대 중반 중앙민족대학을 졸업하고 상해에 배치받은 현 상해택문실업유한회사 전문길 리사장을 비롯한 사람들이 개혁개방후 1세대로 꼽힌다.
조선족 광동성 진출 첫 지역인 심수는 1982년 공정병으로 심수에 파견됐다가 공정부대 전체가 일반회사로 바뀌면서 남게 된 심수심업실업유한공사 김재광 총경리를 비롯한 10여명이 꼽힌다.
이후 중한수교에 따른 한국기업 중국연해지역 진출을 주요 계기로 이들 지역에 조선족들이 본격적으로 진출, 규모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산동은 1990년 위해-인천간의 위동페리 항로가 개통되면서 한국으로 친척방문을 가는 동북3성의 조선족들이 몰려왔는데 현지 정부나 국영회사들에서 한국기업유치를 목적으로 조선족공무원이나 영업사원을 모집하는것을 시작으로 한국기업에 취직하거나 한국인 관련 서비스산업에 종사하는 조선족들이 운집하면서 산동반도 조선족사회는 점차 덩치를 불려나가기 시작했다.
수도권지역은 1988년 서울올림픽개최이후부터 한국기업들이 홍콩이나 일본을 통해 북경이나 천진지역으로 눈길을 돌리기 시작, 1992년 중한수교후 한국기관이나 단체 및 대그룹들의 본부가 북경에 속속 들어서고 공장들이 천진, 하북지역에 입주하면서 한국인들이 많아지고 한국기업들에 취업하거나 한국인 관련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조선족들이 몰려들면서 수도권지역에 한국인과 조선족들이 어우러지는 새로운 한겨레사회가 형성됐다.
1992년 중한수교를 계기로 상해를 비롯한 화동지역을 찾거나 타지역을 가기 위해 이곳을 경유하는 한국인들도 늘기 시작했고 려행사 가이드나 한국회사 직원 등으로 상해에 발붙이는 조선족도 많아지게 됐다.광동은 1995년 광주-서울 직항로 개설, 2001년 주광주한국총영사관 설립 등을 계기로 2002년부터 몇년간 조선족과 한국인들이 급격히 늘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