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화집체농장- 새 중국의 첫 집체농장
새중국 농촌창업사의 한 페이지를 기록한 흑룡강성 화천현 성화조선족향의 성화집체농장은 1951년 2월 22일에 건립됐다.
당시 열혈의 젊은이였던 김백산, 리재근은 36세대의 농가를 이끌고 집체화에 앞장서 피와 땀으로 개간한 벌판에서 천만섬의 벼가 쏟아져 나오게 했다. 그 성공은 중국 전역에 알려져 려명을 맞는 새 중국농촌의 아침을 깨우는 력사적 의미를 지녔다.
집체농장의 규모도 1951년도의 36농가에서 1957년에는 207농가로 늘어났다.
성화집체농장은 특수한 공헌을 인정 받아 1952년 국무원으로부터 '전국 알곡 다수확상'을 수상했으며 큰 붉은 말 네필과 다이야수레 한대를 장려 받았다. 성화촌은 선후 8차례나 성급이상,국가급 영예칭호를 수상했다.
1952년부터 1955년사이 인민일보는 선후 7차례나 성화집체농장의 성공 사례를 보도했으며 성화집체농장의 사적은 당시 소학교 교과서에 편입됐고 기록영화로 제작됐으며 중앙방송과 인민화보에도 널리 보도됐다.
당시 국내 뿐만 아니라 소련, 조선,로무니아,벌가리아,체코 등나라의 방문단도 성화집체농장을 방문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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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률성 강경산 라치환 석산린 |
해방군 군가 작곡가-정률성
중국의 문화예술에 크게 기여한 조선족들이 적지 않다. 고 정률성, 중국 '록크왕자' 최건, 고 정판룡, 고 김학철, 김봉호 등 수많은 우수한 작곡가, 학자, 작가, 평론가들이 배출됐다.
특히 중조 두나라 군가를 창작한 정률성 동지는 세계음악 사상 한 사람이 두나라의 군가를 창작하는 기적을 창조한 우리 민족의 가장 대표적인 음악가이다.
1918년 당시 조선 전라남도 광주에서 출생한 정률성은 1933년 중국에 도착하여 선후로 섬북공학과 로신예술학원 음악학부에서 공부하고 이듬해 1월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정률성은 연안에 있던 기간 가극 '연안송', '팔로군 행진곡' 등 무수한 정품을 창작해냈다. '팔로군 행진곡'은 해방 전쟁 때 '중국인민해방군 행진곡'으로 불리다가 1988년 7월 25일 중앙군위의 명령으로 '중국인민해방군 군가'로 확정됐다.
정률성은 광복후 조선으로 돌아가 '해방 행진곡', '조선인민군 행진곡' , '동해어부', '두만강' 등 30여수의 작품을 창작했다. 그중 '조선인민군 행진곡'은 후에 조선인민군의 군가로 확정됐다.
생애에 400여편의 예술작품을 창작한 정률성 동지는 1950년 주은래 총리의 요청으로 중국에 돌아와 중국 국적에 가입했다. 1976년 12월 7일 58세를 일기로 서거했다.
올해 9월 새 중국 창립 60주년을 맞아 정률성동 지의 탁월한 공헌을 기리여 중앙 부문은 '새 중국 창건 100명 영웅모범 인물'영예를 수여하고 올해 7월에는 정률성 생애 사적 전시관이 할빈서 개관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