女子는 죽어야 한다
굵은 글자들이 벽보의 웃부분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그것들은 손으로 쓴것이 아닌 신문이나 잡지 같은데서 오려내여 붙인 글자들 같았다. 그것들은 한가지 색갈이 아닌 여러가지 색갈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女子는 죽어야 한다’는 일종의 당위성을 말한것 같았다. 그 아래쪽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역시 글자를 오려붙힌 형태로 보다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었다.
오늘밤女子한명을 죽이겠다. 그 女子는 한쪽 귀가 없을것이다. 잘해봐.
Z로부터
장난치고는 아주 재미있는데!그는 미소를 지으며 새 담배에 불을 붙였다. 며칠동안 면도를 하지 못해 그의 완강한 턱주위는 시커먼 구레나룻으로 덮여 있었다. 벽보가 붙어있는 곳은 산부인과병원의 건물벽이였다. 그 병원은 사람들의 왕래가 많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데다가 담당의사의 솜씨가 좋다고 평이 나서 항상 많은 환자들로 붐비고 있었다.
깔끔하게 생긴 중년사내 한명이 병원출입구로 통하는 계단을 올라가다 말고 사람들이 몰려 서있는 곳으로 다가오더니 꽤 놀란 눈으로 벽보를 쳐다보았다.
“어떤놈이 이런걸 여기다 붙여놨어!”
사내는 마치 거기에 몰려 서있는 사람들가운데 누군가가 그 벽보를 붙이기나 한듯 금테안경너머로 그들을 흘겨보고나서 그것을 거칠게 잡아챘다.
벽보는 중간부분이 북 찢겨나갔다. 사내는 나머지 부분까지 잡아챈 다음 그것을 두 손아귀에 구겨쥐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마땅히 버릴 곳이 없자 그것을 들고 병원안으로 들어가버렸다.
벽보가 뜯겨나간 자리에는 네 모서리 부분의 종이쪼각만이 남아있었다. 종이쪼각우에는 테이프가 붙어있었다.
몰려 서있던 사람들은 어느새 제각기 갈길을 향해 흩어지고 있었다.
산부인과 병원앞을 지나친 그는 모퉁이를 돌면서 전자제품 대리점의 대형유리창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 앞을 지나칠 때마다 그는 어느때부터인가 대형유리창에 비친 자친의 모습을 훔쳐보는 버릇이 있었다.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그는 웃음이 나왔다. 눈을 허옇게 뒤집어쓴 그의 모습은 마치 나이든 로인 같아 보였다. 눈은 낡은 코트의 어깨우에도 수북이 쌓여있었다. 그는 머리에 쌓인 눈을 털려고 하다가 그대로 걸어갔다.
모퉁이를 돌아 백여미터쯤 완만한 경사길을 천천히 걸어가자 지은지 얼마 안된 경찰서 건물앞에 이르렀다. 붉은 벽돌로 새로 지은 그 건물은 10층 높이로 제법 웅장해 보였다.
정문 초소앞에 서있던 젊은 순경이 그를 알아보고 거수경례를 보냈다. 그는 고개를 끄덕하면서 손에 들고 있던 담배꽁초를 초소앞에 던졌다. 초소순경은 못마땅한 얼굴로 그의 거부기같은 등을 쏘아보다가 꽁초를 내려다보았다. 그때 그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어이, 그 꽁초 잘 부탁해.”
“알았습니다.”
순경을 꽁초를 집어들었다. 그때 서장이 탄 승용차가 막 안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순경은 한손에 꽁초를 든채 황급히 오른손을 빳빳이 펴서 전투모에 올려붙였다.
전국 경찰은 년말년시에 집중적으로 발생하는 범죄에 대비해서 비상에 들어가 있었다. 이른바 범죄와의 전쟁이 선포되자 모든 경찰관들이 자신들의 의지를 보여주려는듯 전투복차림으로 근무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사복근무조는 그럴 필요가 없어서 다행이였다. 만일 형사도 제복차림을 하라고 상부에서 명령한다면 그는 당장이라도 사표를 낼 준비가 되여있었다.
형사계 사무실안은 별로 이른 시간이 아닌데도 여느때와는 달리 차분한 분위기에 싸여있었다. 아니 차분하다기보다는 모두가 지칠대로 지쳐서 늘어지는 바람에 그렇게 보인다고 하는것이 옳은 표현이였다.
이른바 ‘렬차 살인사건’이 해결된것은 지난밤의 일이였다.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그 사건의 피해자는 무려 다섯명이나 되였는데 범인은 잡고보니 놀랍게도 가냘픈 녀자였다.
그 가냘픈 녀자 범인을 앞에 놓고 형사들은 그만 맥이 빠져버렸고 그래서 더욱 피곤을 느꼈는지도 몰랐다. 1년 넘게 형사들을 골탕 먹인 범인이 만일 남자녀석이였다면 분풀이로 따귀라도 한대쯤 갈겨주었을것이다. 그러나 그 가냘픈 어깨를 떨면서 훌쩍거리는 연약한 녀자를 보고는 모두가 하나같이 어이없어 하면서 고개를 돌려버렸다.
바람만 조금 불어도 금방 날아가버릴것 같은 연약한 녀자가 우람한 남자만 골라 다섯명이나 살해했다는것은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는 일이였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였다.
파리 하나 못죽이는 녀자가 사람은 죽일수 있다. 역설적이지만 이것은 오랜 살인사건 수사에서 그가 터득한 진리였다. 인간의 악마성은 다만 한꺼풀의 순진한 미소속에 감춰져 있을뿐이다. 그 미소가 걷히는 날 오래동안 감춰져있던 악마성이 폭발하는것이다.
“그 아가씨는 어릴 때부터 의부한테 당해왔답니다. 임신하는 바람에 여러번 아기도 지운 모양입니다.”
왕형사가 자리에 앉자마자 문형사가 그의 눈치를 살피면서 재빨리 말했다.
“족치기도전에 술술 불던데요.”
껌을 짝짝 씹어대는 그를 왕은 못마땅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아침부터 그 껌씹는 소리 들어야 하나? 공해라구 공해. 거리에는 수백대의 차가 멈춰서서 엔징소리를 내고 있어. 엔징을 공회전시키는 그 소리에 머리가 돌아버릴번 했어.”
문형사는 씩 웃으면서 껌을 재빨리 재털이속에 뱉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