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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3일: 의거 준비에 바삐 서두르다
할빈에 온 안중근 일행이 가장 급히 해야 할 일은 이토히로부미가 할빈에 오는 날자와 시간을 탐지하는것이였다. 아침식사를 끝마치고 안중근은 할빈시내 구경을 한다는 구실을 대고 우덕순, 류동하를 데리고 김성백의 집을 나왔다. 그들은 먼저 리발소에 가서 머리부터 깎았다. 그리고 중국인 사진관에 들러 좌로부터 안중근, 우덕순, 류동하 순서로 앉아 셋이 같이 기념사진을 찍었다. 할빈공원(지금의 조린공원) 서쪽 대문이 있는 남북으로 관통된 신성대가 (지금의 상지대가) 건너편에 '고려가(지금의 서8도가)'가 있어 안중근의 마음을 끌었다. 할빈에 사는 동포들은 대부분이 고려가 부근에 살고 있었다. 1909년에는 268명의 조선사람이 할빈에 살고 있었다. 당시 할빈에는 조선인 단체로서 '한국민회'가 있었고 교회로서 '기독교조선감리회 할빈례배당'이 있었으며 조선사람의 공동묘지도 따로 설치되여 있었다. '동흥학교'라고 부르는 조선인학교가 있었는데 주로 러시아말과 글을 가르쳤다.
이날 오후 안중근과 우덕순은 김성백의 안내로 동흥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대동공보 할빈지국 일을 맡고 있는 김형재(金衡在)를 찾아 학교로 갔다. 안중근이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날 때 대동공보 편집주임 리강(李刚)이 김형재에게 쓴 편지를 전했다.
김형재는 리강의 편지내용대로 안중근과 우덕순을 안내하여 조도선(曺道善)을 찾아 김성옥(金成玉)의 집으로 갔다. 조도선은 8월에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나 할빈에 왔으므로 아직 자기 집을 잡지 못하고 김성옥의 집에서 숙박하고 있었다. 그때 김성옥은 병으로 누워 있었다. 안중근은 그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김형재 조도선을 만나 서로 안면이 있었다.
조도선은 반가와 하면서 술을 사와 여러 사람에게 권했다. 안중근은 "술을 마시지 못한다"고 하면서 사절했다. 기실 안중근은 일찍 5년 전에 조국이 독립하는 날까지 술을 끊기로 맹세했다.
안중근, 우덕순, 김형재, 조도선, 김성옥 다섯사람이 자리를 같이 했다. 우덕순이 말하기를 "안응칠(안중근)이는 가족을 마중하려 왔고" 자기는 대동공보의 "신문에도 나와 있듯이 신문대금 받으러 왔다."고 하였다. 그러나 술을 한잔한잔 마시면서 화제는 점점 이토히로부미가 할빈에 오는것으로 넘어갔고 조선민족이 고향을 떠나 부평초처럼 해외에 떠다니며 고생하는것으로 이야기들이 나누어졌다.
이날 입수된 10월 23일자 중문 판 '원동보'에 짤막한 기사가 실려 있었다.
"전 조선통감 이토히로부미는 동청철도 총국의 특별렬차 편으로 25일 오후 11시에 관성자역을 출발하여 러시아 재무대신 코코프체프가 기다리는 할빈으로 향한다."
관성자(지금의 장춘)-할빈구간은 237킬로미터로 시베리아 횡단철도 급행렬차 시간표에 의하면 10시간 40분이 소요된다. 따져보면 이토히로부미는 10월 26일 오전 9시 40분쯤이면 할빈에 도착하리라는것을 알았다.
한로가 지난 늦은 가을철 북만의 가을밤은 차디찼다. 안중근은 김성백의 집 방안의 호롱불밑 써늘한 침상우에 앉았다. 그는 장차 해야 할 일을 하나하나 생각하며 감개한 마음을 이길길 없어 시 한수를 썼다. 먼저 한시로 쓰고 다시 한글로 한자한자 써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