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8년 할빈에서 나는 통일전선사업의 수요로 여러차례 '북만청년총동맹'조선독립운동조직을 찾아간적 있다. 그때 리고려(리원명의 가명)가 체포되기전에 그와 여러번 만난적이 있는데 깊은 얘기를 나누었다. 그가 체포된후 우리 당조직은 여러 방면으로 관계를 찾아 동북헌병사령원 류흥아를 설복하려 했다. 후에 장학량이 대사면을 하게 되여 리고려는 그해 말에 풀려나왔다.''
출옥할 때 가족과 친구들에게 들리워 집으로 돌아간 리원명은 온몸이 성한 곳이 없었지만 항일혁명투쟁에 대한 불굴의 의지를 접지 않았다.
항일구국 위해 장렬히 순국
1931년 '9.18'사변후, 북만 각계 애국인사는 중국인이든 조선인이든 물론하고 모두 항일투쟁에 격조 드높이 뛰여들었다. 리원명은 적극적으로 이 성세호대한 항일물결에 투신했다.
이때 조선적 중공당원인 장남운동지가 중국에 망명해온 조선교민들을 조직하여 항일투쟁을 하라는 임무를 받고 소련에서 돌아왔다. 장남운은 원적이 제주도로 북만에서 활동시 장질부사로 위독할때 리원명이 전력으로 구급하여 둘은 각별한 친분을 쌓게 되였다.
장남운은 임무를 받고 할빈에서 먼저 리원명을 찾아 할빈 도외 삼과수지역에 항일련락소를 세웠다. 리원명이 이 지하항일련락소 총 책임자로 겉으로는 모피장사를 한다고 위장하고 유격대가 필요되는 군수품을 제공했다.
이때 리원명은 만주성위군사위원회 서기로, 후에는 파언공농반일유격대 참모장으로 된 조상지를 만나게 된다. 1932년 봄 각종 원인으로 파언공농유격투쟁이 실패하고 일부 성원이 왜놈에게 체포되였다. 그중 어떤 자가 변절하여 리원명의 지하항일련락소를 불었다. 1933년 봄, 리원명의 련락소가 파괴되고 리원명도 할빈일본특무기관에 체포되여 할빈헌병대 구류소에 감금되였다.
일본헌병대는 그에게 혹독한 고문을 들이대면서 모피상, 유격대, 중국공산당, 조선공산당, 소련공산당에 대해 아는것을 죄다 말하라고 강박했다. 리원명은 모른다며 입을 철문처럼 닫았다.
두달동안 갖은 혹형을 들이댔지만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한 일본헌병대는 전신이 만신창이 된 리원명을 일본령사관 지하실 특별간수소에 가두었다. 그때 지하실 감방에 파언유격대원 3명과 함께 갇혀있었는데 모두 악독한 고문에 시달렸다.
''그해 18살인 나는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채로 지하감방에 갇혔다. 한 감방에 있는 리고려(리원명)가 외용약을 꺼내여 내 몸에 발라주고 조선족들이 입는 흰옷 한벌을 꺼내여 내게 입혀주었다. 나는 너무 감동되였다. 리고려는 굳센 혁명자로서 몸이 그토록 만신창이 됐어도 기개를 굽히지 않았다. 그는 조선독립군 사람이였다. 나와 리고려는 두달동안 감방에 같이 있었는데 그는 조선의병운동으로부터 빈현의 활동에 이르기까지 말해주었다. 당시 그가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는지는 알수 없었으나 나는 그가 적어도 공산당을 옹호하고 공산주의를 신앙한다는것을 긍정할수 있었다.” 1933년 10월 반일시위를 하다 붙잡혀 일본령사관 지하실에 갇힌적 있었던 하능(전 서안광업학원 당위서기)은 1988년에 이렇게 회고하였다.
후에 중국공산당 할빈당조직의 구출로 리원명은 마침내 할빈시 도외감옥으로 옮겨졌고 남강법원에 기소되여 공개심판을 받게 되였다. 당시 할빈호제회(전문 옥중 동지들을 구출하는 기구)의 책임자 조상박(조상지의 친형)동지는 1989년 이렇게 회고하였다. ''소련에서 돌아온 중공당원 장남운이 우리 호제회를 찾아와 원 할빈련락점의 리고려(리원명)를 구출해줄것을 간청했다. 나는 곧 관계를 통해 남강법원을 찾아서 법관에게 은화 100여냥을 쥐여주었다. 내 기억에 남강법원은 '이 상인은 리익에 눈이 어두워 정치를 불문하고 치안법규를 무시하며 산중 유격구에서 금지물품으로 장사했다. 이는 일종 적에 대한 지원행위로 징역 8개월에 판결한다. 허나 이미 갇혀있은 시간이 8개월이상 되였으니 즉시 석방한다.'고 판결하였다.''
리원명은 동생 리원호와 리원보에게 들리워 집으로 온지 얼마 안되여 상처가 너무 심한 탓으로 1934년 3월 19일, (음력 2월 5일) 75년전인 오늘에 눈을 감았다. 그때 향년 50세였다. 리원명이 순국한 1시간뒤 안해 박순명은 12시에 유복자 리현덕을 낳았다.
북만당조직에서는 장남운동지를 파견하여 리원명의 후사를 처리하고 러시아공동묘지에 매장하고 비석을 세워주었다. 이 공동묘지는 1958년 할빈시유원지로 개조되면서 그의 묘와 비석은 찾아볼수 없게 되였다.
남편이 사망된후 35살의 박순명은 가냘픈 녀인의 몸으로 올망졸망한 여섯아이를 데리고 완강한 의력과 두려움 모르는 정신으로 운명에 도전했다.
광복의 날, 박순명은 눈물을 흘리며 ''남편이 살아있어도 겨우 61세밖에 안되는데 몇십년동안 광복을 위해 싸우다가 오늘을 기다리지 못했군요. 그래도 오늘을 보면 구천에서 기쁘게 웃을거예요.''라고 말했다.
리원명동지의 일생은 위대하고도 장렬한 일생이였다. 그는 소년시절부터 의병독립운동에 참가하여 조선반도부터 중국 료동반도에, 또한 북만 송화강량안에서 조선독립운동을 위해, 일본제국주의침략을 반대하여 맞서 싸운 중조 량국인민의 혁명사업을 위해 자강불식의 정신으로 영용히 30년을 분투하다가 최종 보귀한 생명까지 바쳤다.
리원명동지의 항일혁명투쟁 사적은 중조인민들이 영원히 간직해야 할 보귀한 정조로 중조인민의 휘황한 항일전쟁 력사를 길이 빛낼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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