흉수를 잡았다고 흐뭇해난 대장은 리원명을 한 마구간에 가두어 놓고 간수 한사람만 남기고는 술집에 갔다. 태평초의 지리환경을 손금보듯 잘 아는 리원명은 바로 이 마구간뒤쪽에 있는 옥수수대로 만든 변소가 생각났다. 마침 간수는 연명을 위해 삼림호위대에서 일하고있는 조선인청년이였다. 리원명은 조선말로 뒤를 보러 변소에 가겠노라고 청을 들어 허락받고 변소의 뒤켠으로 빠져나와 수수밭 속에 숨었다가 북산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리원명은 당일 밤 북산 대우골에 도착해 가족과 상봉했다. 그는 가족더러 이곳에 잠시 며칠간 머물러 있으라고 부탁한 다음 조직을 찾아갔다. 이튿날 최석순(후에 항일참의부 제2임 참의장 겸 중대장 력임)을 만나자 최석순은 그가 큰일을 해냈다면서 백성을 위해 해를 제거하고 조선민중들의 사기를 북돋아주었다고 치하했다. 하지만 이미 관전경내에 수배령이 내렸기에 환인현에 가서 원래부터 하던 후근을 맡는것이 어떻겠는가고 제의했다. 리원명은 이미 리종생이란 원명을 리원명으로 고쳤다면서 이 제의를 달갑게 받아들였다.
1923년 음력 8월 하순, 리원명은 환인현 마권자(马圈子)촌에 가서 의용군총사령으로 있던 로전우 최지풍을 만났고 최지풍은 그를 후근 책임자로 임명하였다. 리원명은 갖은 방법을 다해 부대의 식량을 해결해주었다. 리원명의 모친과 안해 등 친족도 부대의 후근사업에 적극 나섰다.
1924년 6월, 최지풍이 리원명을 찾아와 그더러 북만에 가서 자기 고향친구로 당시 북만청년총동맹 책임자로 있는 황기찬을 찾아가 함께 일하라고 지시하면서 리원명에게 돈 100원과 한묶음의 놋 숟가락을 주면서 그들 가족이 북만에 가는 로비로 쓰도록 했다. 리원명은 눈물을 머금고 생사고락을 같이한 동지들을 떠나 먼 북만으로 가게 되였다.
할빈지역에서 새 투쟁에 몸 바쳐
1924년 12월말, 리원명은 할빈에 와 북만청년총동맹지도자인 황기찬과 련락을 가지고 북만청년총동맹의 요직을 담임하고 리명도라는 가명을 사용했다.
1927년 4월, 리원명은 빈주의 황인툰에서 조선독립운동 지도자 류원제의 조카와 손잡고 진보적인 조선인학교 복흥학당을 세우고 조선청년들에게 애국주의를 각성시켰다. 1928년초 지하혁명가 석만추가 소련에서 빈주복흥학당에 와 교원신분으로 위장하면서 항일혁명력량을 묶었다.
동북당국 정보부문에서는 그를 '소련특무'로 의심하고 오래전부터 그의 행적을 밟기 시작했고 1928년 여름, 리원명의 호송하에 빈주 신전부두를 떠나 할빈으로 가던 그를 할빈도외부두에서 체포했다. 미구하여 리원명도 동북헌병대에 체포되였다.
석만추와는 어떤 관계냐? 석만추는 어디로 뭐하러 가는거냐? 그가 소련에서 월경해온 임무는 무엇이냐? 놈들은 리원명에게 가혹한 고문을 들이대며 윽박질렀다. 리원명은 ''나는 조선혁명가이고 나라가 망하여 중국에 망명왔으며 복국을 위해 조선학생을 양성했다. 석만추는 우리 복흥학당의 교원일뿐 소련 홍색특무와는 상관없다''고 한마디로 잘랐다.
몇달동안 갖은 고문을 들이댔지만 아무것도 얻어내지 못한 헌병대는 하는수없이 리원명을 빈주 지방당국으로 압송했다.
전 중공만주성 성위 상무위원 겸 선전부장, 건국후 중공중앙 대외련락부 부부장, 중앙기률검사위원회 부서기 겸 비서장을 담임한 조의민동지는 1991년 북경에서 이렇게 회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