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2년 봄, 리원명은 천마산별동영을 거느리고 도강하여 관전에 찾아온 최지풍을 맞았고 태평초 동쪽 5킬로미터 되는 괘방(挂房)촌에 안치하였다. 당시 관전현 경내에는 '광복군사령부','천마산독립영' 등 10여개 조선의용군조직이 결성되여 그수가 천여명에 달했다. 이들의 의식주와 무기탄약 등을 해결하는 후근임무가 리원명에게 맡겨졌다.
1922년 6월, 천마산별동영에서 50여명의 전사가 환인현으로 이동한후에도 리원명은 계속해서 후근사업을 맡았다. 같은 해 겨울 최시흥은 리원명더러 조선 창성 북압록강에서 비밀리에 군용물자를 접수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리원명은 10여명의 전사를 이끌고 도강하여 최시흥부대가 절박히 수요하는 솜옷과 경비 2000원을 안전하게 받아왔다.
벌목회사 두목을 처단
왜놈들은 '압록강일본벌목공사'를 세우고 동북지역의 림강, 관전, 안동(지금의 단동) 등 여러곳에 분사를 설립하여 중국의 삼림자원을 마구 략탈하였다. 당시 관전현 로흑산(老黑山) 분사 경리로 군관출신인 일본인 아라키가 맡고 있었는데 민중을 억압하고 온갖 못된 짓을 다 저질러 악행이 자자했다.
리원명은 박윤범, 박태봉과 상론하고 아라키를 처단하기로 결정하였다. 1923년 8월 30일(음력 7월 19일) 깊은밤, 리원명은 로흑산분사 아리키놈의 거처에 깜쪽같이 잡입하여 술에 취해 쿨쿨 자고 있는 그놈의 가슴에 복수의 비수를 꽂았다.
놈의 권총을 집어들고 돌아나오다 한 조선인첩자가 다급히 삼림속으로 도망치는것이 보였지만 시간이 긴박하고 위험이 큰지라 더는 추격못하고 재빨리 로영구(老营沟)로 돌아왔다. 그는 안해 박순명더러 가족을 거느리고 먼저 북산 대우골 조선인 집거구에 피신가도록 했다.
그날 도망친 자가 압록강삼림호위대 총부에 가서 리씨성을 가진 조선인독립군이 처소에 뛰여들어 아라키를 죽였다고 보고했다. 호위대장이 로흑산분사에 달려가보니 아라키는 피못속에 너부러져 있었다. 날이 밝을 무렵, 조선인첩자를 앞세운 놈들이 태평초까지 추격해왔으나 헛물만 켜고말았다. 놈들은 조선복장으로 차림새를 바꾸고 동쪽 10여리 떨어져있는 로영구로 뒤쫓다 공교롭게 막 문을 나서려던 리원명과 맞띄웠다. 미처 몸을 빼지 못한 리원명은 붙잡히고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