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의거 100주년 특별기획-의사의 얼을 새겨 한세기(실화편)
안중근의사 의거 100주년을 맞으면서 흑룡강신문사에서는 '의사의 얼을 새겨 한세기' 대형기념행사를 진행한다. 이 기념행사의 시작으로 할빈시민족종교사무국 전임 부국장 서명훈 선생이 집필한 '안중근의사의 할빈에서의 11일'을 련재한다. 우리가 여직 몰랐던 력사자료와 진실한 사실로 서술된 이 책은 독자들의 관심과 흥취를 자아낼것이다. 열독을 권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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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의사 |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경 일본국 추밀원 의장 이토히로부미가 탄 특별귀빈렬차가 할빈역에 서서히 닿았다. 플랫폼에서 이토히로부미를 환영하는 러시아군대, 중국군대, 할빈에 주재하는 외교사절단, 할빈주재 일본총령사관 관경, 일본교민들이 들끓기 시작하였다. 군악대의 주악소리가 하늘을 울렸다.
기차문이 열리면서 이토히로부미가 기차문앞에 나타났다. 그는 모자를 벗어들고 환영대오에 답례하였다. 러시아관원들과 일본관리들이 기차문앞으로 가서 이토히로부미를 좌우로 배동해 동쪽으로부터 서남쪽 방향으로 환영대오를 검열하고 되돌아왔다. 이토히로부미는 환영대를 지나 호위를 배동하고 있는 사람들의 맨앞에서 걸었다. 이때 러시아군대의 뒤에 영특하게 생긴 청년이 서있었다. 그는 검은색나는 양복을 입고있었고 우에는 신사외투를 입었다. 그는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다가 날쌔게 권총을 꺼내여 이토히로부미를 겨누고 세방을 쏘았다. 극악무도한 침략자 이토히로부미는 죄악의 인생을 끝마쳤다. 이 영특하고 위엄스러운 청년이 바로 조선인민이 세세대대로 칭송하는 민족영웅 반제의사 안중근이다.
출신과 성격
안중근의 자는 응칠(应七)이고 성명(圣名)은 도마이다. 그는 1879년 9월 2일 조선 황해도 해주부 수양산에서 탄생하였다. 그의 성격이 가볍고 급하기에 중근이란 이름을 달아주었다. 태여나면서부터 가슴과 배에 걸쳐 검은 점이 7개 박혀있어 북두칠성에 응한것이라 하여 자를 응칠이라 하였다. 그는 천주교에 입교하여 령세를 받고 '도마'라는 믿음의 이름을 가졌다. 안중근은 력대로 내려오면서 명문대가의 출신이다. 가훈은 '정의'로 되여있다. 조부인수는 종6품 벼슬로 진해현감을 지낸 덕망높은 분이였다. 부친 태훈은 학문이 깊고 넓으며 재능과 지혜가 뛰여난 사람이다. 9살에 4서 3경을 통달했고 13세에 과문과 '4.6병려문'(4자 6자의 구를 댓글로 많이 쓰는 한문문체)을 다 읽고 선동으로 원근에 소문났다.
1884년 서울에 거주하는 기간 개화인사들과 자주 접촉하면서 개화사조를 받아들여 정부를 혁신하고 국민을 개명시키며 일본으로 류학가려 하였다. 이일이 조정에 발각되여 테포대상으로 되였다. 안태운은 이를 피하기 위하여 고향으로 내려가 가산을 몽땅 팔고 일가권손 70명을 이끌고 해주를 떠나 신천군 두라면 청계동 산간마을로 이사하였다.
이때 안중근은 6세였다. 조부님의 사랑을 각별히 받으며 집안 서당에 9년을 다니면서 4서 3경의 유교경전과 '통감' 등을 수학하였다. 안중근은 어릴때부터 수렵과 말타기를 즐겨 늘 포수군을 따라 산과 들에 나가 사격술을 익혔다. 안중근이 14세가 되던해에 조부가 세상을 떠났다. 그는 나이가 들며서 담도 더욱 커졌다. 혼자서 총을 메고 산으로 올라가 사냥을 하였기에 부모와 교사들의 꾸지람도 많이 들었다. 친한 친구들이 그를 보고 "너의 부친은 문장으로 이름이 났는데 어찌하여 장차 하등인이 되려고 하는가"라고 말했다. 그러면 안중근은 "너희들의 말이 옳다고 하자. 하지만 초패왕 항우가 말하기를 글은 이름이나 적을줄 알면 그만이라고 말하면서 자기의 고집대로 일을 하여 결국은 초패왕은 만고영웅이 되였다"고 말하면서 자기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1894년 안중근은 기골이 청수하고 인물이 훤칠한 청년으로 자라났다. 비록 장가를 들어 가정을 가지고 있었지만 성격이 활달하고 정의감이 활달한 사람이라 친구들과 결의를 맺는것을 즐기였다. 하여 의협심이 많고 사나이다운 사람이 어디에 있다는 말만 들으면 총을 지니고 말을 달려 찾아갔고 과연 자기의 친구가 될만 하면 웅변을 토하면서 속심을 털어놓고 술을 마시면서 취한 뒤에 노래하고 춤을 추기도 하였다. 하루는 안중근이 동무 몇명과 같이 구식 6련발 총을 메고 산에 가서 노루사냥을 하는데 공교롭게도 탄환이 총구멍에 걸려서 빼낼수도 없고 들이밀수도 없어 쇠꼬챙이로 총구멍을 마구 쑤셨더니 '꽝' 하는 굉음이 터지면서 모두가 혼비백산하여 있는데 탄알이 안중근의 오른손을 뚫고 공중으로 날아갔던것이다. 안중근은 할수 없이 병원으로 가 치료를 받았다. 그 무렵 안중근의 가족들은 천주교를 믿게 되였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안중근은 17세에 입교하여 프랑스선교사 홍신부 요셉에게서 령세를 받았다. 경문도 강습받고 진리도 담론하면서 홍교사와 함께 여러 곳을 다니면서 전도하였다. 그시기 안중근은 홍교사를 통하여 프랑스어도 배웠다.
나젊은 안중근은 담대하고 용감하였으며 사격술이 좋았을뿐만 아니라 언변이 좋고 정의를 주장했다. 교회에서 안중근을 수차 '총대'의 신분으로 파견하여 교회와 지방정부, 신도와 지방관리들 사이의 모순을 해결하도록 하였는데 번번이 승리하여 돌아왔다. 안중근은 신도들의 문화소질을 제고시켜 교리를 선도하는데 유리하고 앞날 국가대사에 유리하도록 하기 위하여 홍신부에게 서양수사회 가운데서 박식한 성비 몇사람을 청해와 대학교를 건립할것을 건의하였다. 홍신부는 마음대로 결정할일이 아니라고 안중근과 같이 서울로 가서 민주교를 만나보고 그 의견을 제출했더니 민주교는 "한국인이 만일 한문이 있게 되면 교를 믿지 않을수 있으니 다시는 그런 의론을 꺼내지 마시오"라고 하는것이였다. 재삼 청구했으나 민주교는 들어주지 않았다. 안중근은 이 일로 하여 교의 진리를 믿을 지언정 외국인의 심정은 믿을것이 못된다는 결론을 얻게 되였다. 홍신부는 언제나 교인들을 압제하는 페단이 있었기에 안중근은 보고만 있을수 없어 교인들을 모아놓고 "거룩한 교회안에 어찌 이같은 일이 있을수 있겠는가? 우리는 당연히 경성에 가서 민주교에게 청원하고 만일 민주교가 안들어 주면 당연히 로마부 교황에게 가서라도 기어이 이러한 페습을 막도록 하는것이 어떻소?"하자 모두들 그대로 따르기로 했다. 그때 홍신부는 크게 성이나 안중근을 차고 때렸다. 그러나 교인들이 굽어들지 않고 하나같이 뭉쳐 반항력이 컸기에 홍신부는 하는수없이 머리를 숙이고 교인들에게 잘못을 뉘우쳤다. 그후부터 홍신부는 다시는 함부로 교인들을 압제하지 못했다.
구국의 길을 찾다
1894년 일본은 조선의 친일파 동학당이 봉기하는 기회를 타 조선에 출병하였다. 이해 7월에 갑자기 중국륙해공군을 습격하여 중일 갑오전쟁이 폭발하였다. 중국인민과 애국적 장병들이 영용하게 싸웠지만 청나라 정부의 부패로 인하여 중국이 패전하였다. 1895년 4월 17일 청나라정부는 화평담판 전권대신으로 리홍장을 파견하여 일본수상 이토히로부미와 국권을 상실한 '마관조약'을 체결하고 청나라군대를 조선반도에서 전부 철거하게 되였다.
이토내각은 조선에 있는 러시아 세력이 일본이 조선에 대한 독점을 방해한다고 하여 1905년 미, 영제국주의 지지하에 일로전쟁을 발동하였다. 이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중국 동북지역에서 러시아의 지배적 지위를 빼앗고 조선을 독점하였다. 이해 11월 이토히로부미는 조선황제를 핍박하여 망국적인 '을사보호조약'에 조인하도록 하였다. 1906년 2월 1일 일본침략자는 서울에서 통감부를 설치하고 이토히로부미가 초대 통감으로 되였다. 이때로부터 조선은 일본의 통치하에 인간지옥으로 변했다. 일본군대는 조선에서 제멋대로 날치며 살인 방화하고 재물을 략탈하고 부녀들을 강간하고 애국지사들을 학살하여 삼천리강산을 도탄속에 빠뜨렸다. 이 모든것은 안중근으로 하여금 뼈에 사무치는 민족원한을 품게 하였다. 백성들이 흘린 선혈은 그로 하여금 일본정부가 부르짖는 '동양평화'의 진면모를 알게 하였다.
안중근은 분노하여 아버지께 말하기를 "일본과 러시아가 개전했을 때, 일본이 전쟁을 선포하는 글 가운데 동양의 평화를 유지하고 한국의 독립을 굳건히 하겠다고 해놓고 이제 일본이 그같은 대의를 지키지 않고 야심적인 책략을 자행하고 있는데 그것은 모두 일본의 소위 정치가 이토의 정략입니다. 먼저 강제로 조약을 정하고 다음으로 유지당(有志党)을 없앤 뒤에 강토를 삼키려는것이 현재 나라 망치는 새 법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속히 계획을 세우지 않으면 큰 화를 면하기 어려울것인데 어찌 손을 마주쥐고 아무 방책도 없이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안중근은 계속하여 아버지를 보고 "그러나 이제 의거를 일으켜 이토의 정책에 반대한단들 강약이 같지 않으니 부질없이 죽을뿐, 아무 리익이 없을것입니다. 현재 들으면 청국 산동과 상해 등지에 한국인이 많이 살고 있다고 하니 우리 집안도 모두 그곳으로 옮겨가 살다가 선후 방책을 도모하는것이 어떻습니까? 그러면 제가 먼저 그곳으로 가서 살펴본 뒤에 돌아올것이니 아버지께서는 그 동안에 비밀리 짐을 꾸린 뒤에 식구들을 데리고 진남포로 가서 기다리시다가 제가 돌아오는 날 다시 의논해서 행하도록 하십시오."라고 하였다.
부자간의 상의 끝에 계획이 정해졌다. 안중근은 즉시로 길을 떠나 중국 산동 등지를 두루 다녀본 뒤에 상해에 이르렀다. 안중근은 상해에서 그전 조선에서 관직에 있던 사람들을 찾아서 나라를 구하고 인민을 구하는 대사를 상론하려는 마음에서 몇사람을 찾아갔으나 모두 문을 닫고 만나주지 않았다. 안중근은 또 장사하는 사람들을 찾았으나 그들은 더욱 조국의 흥망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안중근은 여러 날 동안 서로 뜻이 같고 신념이 일치한 사람을 찾았으나 그런 사람은 만나지 못하였다. 그는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며 스스로 생각하되 "우리 한국사람들이 이와 같이 안도를 탐내는 소인들 같으면 나라의 앞길이 무슨 희망이 있겠는가?" 안중근은 잠시 좌절당했으나 나라와 백성을 구할 결심은 변함없었다.
안중근은 어느 날 천주교당에 가서 기도를 드렸다. 때마침 이곳에서 곽신부를 만났다. 이 신부는 프랑스 사람으로서 여러해 동안 한국에 와 머물며 황해도지방에서 전도하고 있었기에 안중근하고 서로 아는 사이였고 이제 홍콩을 거쳐 한국에 돌아가는 길이였다. 안중근은 곽신부에게 자기가 상해에 온 목적을 이야기해주었다. 곽신부는 안중근의 생각이 부당하다고 하면서 "만약 2천만 민족이 모두 너같이 한다면 (가족을 거느리고 외국에 이사하여 산다면) 나라안은 온통 빌것이니 그것은 곧 원쑤가 원하는 바를 이루어주는것이다. 너는 속히 본국으로 돌아가서 먼저 네가 할 일이나 하도록 해라. 첫째는 교육의 발달이요, 둘째는 사회의 확장이요, 셋째는 민심의 단합이요, 넷째는 실력의 양성이다. 이 네가지를 확실히 성취시키기만 하면 2천만의 정신(마음)의 힘이 반석과 같이 튼튼해서 천만문의 대포를 가지고서도 도저히 공격하여 깨뜨릴수가 없을것이다." 라고 권고하였다. 안중근은 곽신부의 주장이 도리가 있다고 생각되여 곧 행장을 차려가지고 기선을 타고 상해로부터 진남포로 돌아왔다.
진남포에 돌아온 안중근이 집안소식을 알아본즉 그동안에 가족들이 이미 청계동을 떠나 진남포에 도착했는데 다만 아버지께서 중도에 병세가 더욱 중해져서 세상을 떠났기때문에 가족들이 아버지의 령구를 모시고 도로 돌아가 청계동에 장례 모셨다고 한다. 이 소식을 들은 안중근은 통곡하며 몇번이나 까무러쳤다. 그는 청계동 집에 이르러 상청을 차리고 재계를 지켰다. 이때부터 안중근은 술을 끊기로 맹세했고 대한독립 하는 날까지로 기한을 정했다.
1906년 봄 3월에 안중근은 가족들을 데리고 청계동을 떠나 진남포에 이사해 살면서 양옥 한채를 지어 살림을 안정시킨 뒤에 집 재산을 기울여 두 곳에 학교를 세웠다. 하나는 삼흥학교(흥국,흥민,흥사)이고 또 하나는 돈의 학교이다. 안중근이 친히 교장을 맡아 재주가 뛰여난 구국영재를 교육했다.
그 다음해인 1907년 봄에 하루는 김진사라고 하는 사람이 안중근을 찾아왔다. 그는 안중근의 부친과 친교가 두터운 사람이라 특별히 찾아왔다고 하였다. 김진사가 하는 말이 "그대의 기개를 가지고 지금 이같이 나라 정세가 위태롭게 된 때에 어찌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려 하는가?"하고 물어보듯 하더니 그는 다시 말을 이어 "지금 백두산 뒤에 있는 서간도와 북간도 그리고 러시아 령토인 블라디보스토크 등지에 한국인 백여만명이 살고 있는데 물산이 풍부하여 과연 한번 활동할만한 곳이 될수 있네. 그러니 그대 재주로 그곳에 가면 뒤날 반드시 큰 사업을 이룰것일세"라고 하였다. 안중근은 김진사의 말에 도리가 있다고 생각되여 다시 중국으로 왔다.
의병을 조직하여 일본군을 타격
1907년 7월 19일 이토히로부미는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고종황제를 강제로 페위시키고 7월 24일 일제 주구정부와 '정미7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에 의하면 조선정부는 '시정개선에 관하여 통감의 지도를 받을것', '법령의 제정 및 중요한 행정상의 처분은 미리 통감의 승인을 거쳐야 할것', '조선의 고등 관리의 임명은 통감의 동의로서 일을 행할것', '조선정부는 통감이 추천하는 일본인을 한국관리에 채용할것' 등 차관정치를 실시하여 조선의 운명을 완전히 일본제국주의 강도가 좌우지 하였다. 그리고 이해 8월 1일에는 강박적으로 조선군대를 해산시켰다. 전국 각지의 조선군인들은 해산명령이 내리자 폭동을 일으켜 무기 탄약창고를 쳐부시고 자기들을 무장하여 병영을 접수하려는 일본침략군과 결사적인 결투를 벌렸다. 조선의 전국 각지에서는 각 계층 백성들의 각종 형식의 애국투쟁이 화산처럼 폭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