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차림풍습의 변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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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6세기 녀자의 겉옷으로는 로의, 오군, 장삼, 몽두의, 장옷, 너울 등이 있었다. 대부분이 고려때부터 내려온것이였으며 다만 장옷, 너울이 이 시기에 새로 생긴것이다. <<태종실록>>은 봉건관료들속에서 로의, 오군은 신분이 높은 부녀자들의 의복이였는데 지금은 상인들과 천한 녀자들도 다 입고있어 높고낮음을 판별할수 없다고 하면서 이전부터 4품이상의 정처는 로의, 오군을 입게 하고 5품이하의 정처는 장삼, 오군을 입되 로의는 입지 못하게 하여 높고낮은 등급을 가릴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고 주장한 사실을 전하고있다. 이 기록은 물론 그대로 믿을수 없으나 량반과 천민을 구분할수 없을 정도로 일반부녀자들도 로의와 오군을 널리 입었다는것과 로의, 오군, 장삼을 입는데서 벼슬등급과 신분에 의한 제한이 강조되였다는 것만은 알수 있다. 이 모든 사실은 로의, 오군, 장삼에 대한 계급신분적제한이 리조초기에는 그리 심하지 않았는데 후에 점차 심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장소은 삼국시기부터 내려온 <<포>>의 일종이다. 포는 고려시기에도 있었는데 그것은 남자의것과 비슷하였다. 장옷은 본래 남녀구별이 없던 겉옷이였으나 리조봉건통치배들은 녀자들이 장옷을 입는 것을 금지하고 그대신 너울을 쓰게 하였던것이다. 너울은 얼굴가리개의 일종으로서 15세기초에 기건이라는 사람이 그것을 만들어 국가에 바쳐 궁녀들부터 쓰기 시작하게 한것이라고 한다. <<태종실록>>에 의하면 봉건정부는 가는 모시와 베로만 몽두의를 만들게 하고 비단으로 만드는것을 금지하였다. 몽두의는 일반녀성들도 입을수 있는 겉옷이기는 하였으나 기실 가난한 사람들은 그러한 옷을 만들어 입을만한 살림밑천이 없었다.
우에서 보는바와 같이 15~16세기의 옷차림풍습에서 나타난 특징은 옷차림에 대한 계급적신분제한이 그 이전시기보다 강조되였으며 또한 성별에 따르는 구분이 엄격해진것이다. 고려시기의 일부 겉옷들은 남녀구별이 명백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15~16세기에 와서 모든 옷의 남녀구별이 더욱 명백해졌다. 고려말까지 남녀구별이 없이 입던 장옷은 15세기중엽부터 녀자들이 입는것을 엄금하였다. 남녀의 구별은 장옷이 얼굴가리개로 전환되고 너울과 같은 얼굴가리개가 이전시기보다 더 늘어난데서 잘 알수 있다.
17 ~19세기 전반기에 이르러 옷의 종류와 옷차림새가 다양해졌으며 일부 의복제도에서 신분적 재한이 점차적으로 약화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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