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차림풍습의 변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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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6세기 기본옷의 종류와 형태는 그전보다 달라진 점도 있으나 대체로 고려시기와 비슷하였다. <<태종실록>>에서 볼수있다 싶이 1403년에 녀성들의 의복제도를 고치려다가 당분간 종래의 의복제도를 그대로 두기로 하고 다만 규정에 어긋나는 것과 사치한것들만을 고쳐 상하의 등급을 구별할수 있게 한 사실이 이것을 증명해주고있다.
이 시기 남자들의 기본옷은 긴 저고리와 비교적 통이 넓은 바지였다. 저고리모양은 종전의것과 같았으나 바지의 가랭이가 약간 넓어진 것이 고려시기의 바지와 다른 점이다. 이것은 15~16세기에 온돌이 널리 보급됨에 따라 온돌에 편안히 앉을 수 있게 바지가 개선되였다는 것을 말하여준다.
15~16세기의 기본옷에서 종전과 크게 다른 점은 솜저고리와 솜바지가 생겨난것이다. 솜옷의 출현은 우리 민족의 옷차림풍습에서의 큰 변화의 하나였다. 겨울에 홑옷을 여러벌 껴입던 불합리성을 없애고 포근한 솜옷 한벌로도 추위를 막을수 있게 된것은 당시 조선민족인민들이 자연을 이겨내고 자연계에서 생활필수품을 얻어내기 위한 투쟁에서 이룩한 새로운 성과의 하나였다.
15~16세기에 농업생산의 거족적인 발전은 우리 민족의 옷차림풍습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이 시기 면화의 광범한 재배와 무명생산의 거족적인 발전은 우리 민족의 옷차림풍습에서 옷감구성을 크게 변화시켰다. 고려말기까지만 하여도 무명은 아직 옷감으로 널리 리용되였는데 그중에서도 인민들에게 차례진 것은 주로 베였다. 그러나
15~16세기의 옷감리용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것은 무명이였다. 그리고 솜을 리용하여 솜옷을 지어입을수 있었다. 그러나 면화가 생산되지 못하던 북부산간지대에서는 여전히 베를 옷감으로 리용하였으며 겨울에는 짐승가죽을 리용하기도 하였다.15~16세기 녀자옷구성에서 주목되는 것은 속적삼이다. 속적삼은 땀받이, 즉 한삼이라고도 하였다. 속적삼은 1493년에 출판된 <<악학궤범>>의 도해에서 볼수 있는 바와 같이 기본적으로 저고리모양과 같으나 전반적으로 저고리보다 좀 작고 고름과 동정이 없었다. 속적삼은 계절에 따라 무명, 명주, 모시, 베 등으로 만들었는데 부유한 량반계층부녀들은 명주와 모시로, 일반부녀자들은 주로 무명과 베로 만들어입었다. 하지만 속적삼이 이 시기 기록에서 보인다 하여 그것이 15~16세기에 처음 생긴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눈에 잘 뜨이는 기본옷이나 겉옷과는 달리 속에 입는 속적삼이 기록으로 전해지게 되였다는 것은 그당시에 상당히 보급되고 일반화되였다는 것을 의미하는것이며 따라서 그것은 고려시기의 속옷이 계승된 것이라고 할수 있다. 15~16세기의 겉옷들에는 일정한 변화들이 있었다. 고려시기에 남자들은 주로 저의나 포를 입었는데 이 시기에 와서는 첩리, 답호도 입었다. 후세의 기록이지만 <<순조실록>>은 우리 민족의 의복제도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 첩리라고 하면서 그것은 우와 아래가 잇달려있고 그것을 포속에 입었기 때문에 첩리라 한다고 하였다. 답호도 역시 첩리와 비슷한것이였는데 이것들은 봉건량반들이 평시에 입는 옷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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