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실로 공양왕보다도 우와, 창왕만큼도 덕이 없더냐."
하고, 회고해 보았다.
망명의 무리들은 그날 하루 종일 그치지 않았다. 한 사람 두 사람 문 밖에 모인 숫자가 일흔 두 명이었다. 그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송악산 깊숙한 만수산 밑에 초막을 짓고 한 마을을 형성하였다.
바로 그 이튿날은 또한 무과(武科)를 보이는 날이었다.
이 날에도 촌 사람 활량 몇 사람이 과거에 응시하였을 뿐 하나도 전조 호반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고 또 궁에서 바라보이는 언덕을 향하여 기어오르는 무리가 있었다. 그 숫자가 마흔 여덟 명이었다. 이들도 만수산 옆, 보봉산(寶鳳山) 아래에 초막을 짓고 집단 생활을 하기 시작하였다. 태조는 실로 괴로울 뿐 아니라 분하였다.
일찍이 이 나라의 백성들이 시중 이성계를 얼마나 열렬히 환영하였는가. 싸움마다 승리하고 돌아올 때면 이 백성들은 이시중 천세를 고창 하지 않았는가.
괘씸하였다. 그러나 다시 한 번,
`그들의 마음을 돌이키게 하여 나의 신하로 하여 보자.`
하고, 왕사(王使)를 보냈으나 그들은 완강히,
"우리들은 장사나 해먹고 살겠노라."
하는 것이었다. 이에 왕과 신하들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