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생활〕
8·15광복 후 정치·사회적 불안정으로 항구적인 주택건설사업에 역점을 둘 여력이 없는 데다가, 월남민들과 만주·일본 등지에서 귀환한 동포들의 수적 증가로 심한 주택난에 시달렸다.
더욱이, 6·25전쟁을 겪으면서 전국토가 파괴되고, 조선으로부터의 수백 만의 피난민 이주는 주택사정을 극한적으로 어렵게 만들었다. 극심한 주택부족은 UN의 원조와 자체의 건설 노력에도 불구하고 판자촌과 천막촌 등 무허가주택을 난립시키는 폐해를 가중시켰다.
1960년대까지의 이러한 어려움은, 정부 주도의 공공주택 건설의 노력과 민간자본의 주거건설참여로 1980년대까지 적극적인 단지개발과 주거의 질적 내용을 개선하고자 하는 노력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급증하는 인구와 세대구성의 핵가족화 및 택지의 절대적 부족이 높은 토지가격의 부담과 함께 주택보급을 과거보다 더 악화시키고, 국민소득의 한계로 말미암아 손쉬운 주택취득은 아직도 기본적인 문제로 남아 있다.
특히, 산업화과정에서 인구의 도시집중현상이 가속화되면서 도시의 주택부족률은 계속 증가하여 1983년 말 현재 약 46.5%에 달하고 있다. 이를 농촌지역의 8%와 비교해 볼 때, 오늘날 대한민국의 주택난은 바로 도시지역에 있어서의 문제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셋방살이는 대한민국의 도시서민들 사이에 일반화된 삶의 형태가 되었다.
1995년 말 전국의 가구수는 1113만 가구, 주택수는 957만 호로 86.1%의 주택보급률을 보였다. 1988년에 시작된 200만 호 건설계획과 1993년부터 시작된 신경제5개년계획은 1988년의 70%에도 미달하던 주택보급률을 상승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