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회사는 현지 적응이 난제지만 조복자는 해외 출장으로 맺은 사업 파트너들 덕분에 어려운 난제를 미리 해결할수 있었다.
임가공 위주인 청도에서 가발업체 하게 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대표적인 인물중의 하나가 바로 조복자(60세)이다.
가발업만 30여년 해온 그를 만나려고 몇번이나 시도했지만 번마다 그녀의 잦은 출장 때문에 이뤄지지 못했다.
“이번 걸음에도 큰 수확을 거두었습니다. 탄탄한 실력을 갖춘 바이어도 만났구요.”
얼마 전 기자를 만난 조복자가 터놓은 첫마디이다. 타이, 미얀마, 베트남 등 동남아 국가를 돌고 금방 귀국한 그의 얼굴에는 피로 대신 희색이 만면했다.
청도에서 사업하는 대부분 임가공업체 사장들은 직장을 찾아 청도에 진출한 후 창업한 사람들이 많았으나 조복자의 경우는 다르다.
그는 대련리공대학에서 화학공업을 전공했고 졸업 후에는 당시 꿈의 직장이라 불리웠던 국유기업 길림화공설계원에 배치받았다.
1986년 졸업 당시 화공을 전공한 대학생의 몸값은 상당히 높았다. 중요한 프로젝트가 있을 때마다 조복자의 이름이 거론되였고 장래가 촉망된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던 1992년, 국유기업에서 크게 발전할 것 같던 조복자가 돌연 깜짝 뉴스를 터뜨려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하해’를 선고한 것이다.
웬간한 직장에서는 상상하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대우도 좋고 복리도 좋은 회사에서 사직하려고 하자 주변에서는 너도나도 말렸다. 그러나 항상 도전적이고 진취적인 조복자는 결연히 철밥통을 버리고 시장경제의 바다에 몸을 맡겼다.
“국유기업에 있으면서 좋은 대우도 받고 나름 대로 할 일도 많았지만 대학을 다니면서 꾸었던 꿈과 점점 멀어져 가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과감히 하해를 선택했습니다.”
조복자는 6년 동안 몸담았던 국유기업을 떠나게 된 리유를 간단히 밝혔다.
조복자는 청도에 진출한 후 직장 역시 화학공업분야인 가발무역을 선택했다.
국유기업에서 닦은 실력과 화학분야에 대한 박식한 견해 그리고 후더운 인심과 깔끔한 일처리 습관은 이내 업계와 동료들의 인정을 받았다.
청도진출 6년 만인 1998년, 조복자는 본격적으로 독립의 길을 걸었다. 약속을 철저히 리행하고 항상 배려하는 마음을 앞세웠던 조복자가 회사를 차렸다는 소식에 주문이 줄을 이었다.
회사가 만가동 만부하 상태일 때 종업원 수는 1000명을 넘었다.
현재 조복자는 련운항, 황도, 지묵, 청도에 네개의 가발공장을 운영하고 있으며 종업원 수도 250여명 된다.
코로나19 이후 많은 임가공업체는 주문량이 없어 아우성인데 주문이 끊기지 않는 비결은 무엇일가?
“주동적으로 시장에 다가가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회사의 주문건은 거의 모두가 해외 출장을 통해서 따왔습니다.”
그는 화상채팅이나 메일을 몇번 주고받고 전화통화로 주문을 따는 시대는 지나갔다고 했다. 우리가 주문을 따내기 위해 고민하는 것처럼 상대 역시 똑같은 고민을 하고 있다는 것이 그의 견해였다.
“똑같은 상황에서 누구를 선택하겠습니까? 직접 만나본 사람에게 주는 게 상식이 아닐가요?”
코로나19 방역규제가 해제된 후 그는 한국, 일본, 타이, 말레이시아, 미얀마 등 동남아시아 국가에서 펼쳐진 무역행사에 거의 다 참가했다. 스치듯 만난 사람일지라도 몇번의 만남을 거치면 소통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조복자는 그런 인연을 놓치지 않았고 주동적으로 다가갔다.
“그냥 얼굴만 피끗 봤던 사람일지라도, 다음번 대회에서 만나게 되면 서로 인사도 하게 되고 자기소개도 할 수 있게 되더라구요.”
먹고살기도 힘든데 많은 돈을 팔면서 해외 행사에 왜 다니느냐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조복자는 해외 주문을 받으려면 해외에서 펼쳐진 무역인들의 대회를 외면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최근에 조복자는 미얀마에 새 공장을 차렸다. 30만딸라를 투입하여 세운 회사는 곧 가동을 앞두고 있다. 그는 워낙 타이에 회사를 차리려고 하였으나 미얀마 지인들을 만나 미얀마를 선택했다고 했다.
지인들은 미얀마에서 몇해간 회사를 운영중에 있는 사람들로서 그에게 금쪽같은 건의를 했고 타이와 미얀마의 차이점 그리고 수출에 필요한 정보를 상세히 제공해줬다.
그가 말한 ‘지인’ 역시 해외 활동을 통해 만난 사람들이다. 그는 지인들의 충고 덕분에 미얀마에서 산뜻한 출발을 할 수 있게 되였다고 했다.
국내도 아닌 해외에 회사를 차렸을 때 가장 어려운 문제는 바로 현지 적응이다. 그러나 조복자는 해외 출장으로 맺은 사업 파트너들 덕분에 현지 적응이라는 어려운 난제를 미리 해결할 수 있었다.
“예전에는 생산관리만 하고 주문에 대해서는 신경을 안 썼습니다. 낯가림이 심해서 거의 대외 교류도 안 했구요. 그러나 대외 교류를 하면서 성격도 많이 변했습니다. 예전처럼 낯가림도 안 하구요.”
조복자는 지난 19일, 오스트리아 수도 윈에서 열리는 무역회의에 참가하기 위해 해외 출장길에 올랐다.
성공가도를 달려오면서 한두번은 곁눈도 팔 수 있었으련만 조복자는 가발이라는 한우물만 파왔다.
길림화공에서부터 조복자와 인연을 맺어온 청도의 최동규는 조복자에 대한 인상을 “성실하고 따뜻하고 자신감 넘치는 사람이다.”고 평가했다.
기업인을 꿈꾸는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가고 물었다.
“자기 분야에서 전문가가 되겠다는 생각을 안고 최선을 다하고, 무조건 열심히 달리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달린것 만큼 시장이 열립니다.”
출처:연변일보
편집:김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