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룡강신문=하얼빈)중국의 력사에서 1945년 8월 15일 항일전쟁의 승리로부터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까지의 사이를 해방전쟁시기라고 한다. 이 4년 사이에 중국은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신민주주의 새로운 국가를 건립하느냐, 아니면 국민당이 독재하는 낡은 국가를 그대로 유지하느냐 하는 두가지 운명 두가지 전도의 판가리싸움이 벌어졌다. 이와 같은 국세에서 할빈시의 조선인들은 중국공산당을 따랐고 신민주주의 혁명의 승리를 위하여 많은 공헌을 하였다.
해방전 할빈의 지하에서 활동하던 조선독립동맹 북만특별위원회는 해방이 되자 간판을 내걸고 공개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김택명을 서기로 한 조선독립동맹 북만특별위원회 성원들은 조직, 선전, 확군 등 사업을 통하여 할빈과 북만 각 현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이 죽국공산당을 따르도록 이끌었다. 1945년 12월 25일에 건립된 조선의용군 3지대는 김택명을 지대장으로 연안에서 나온 주덕해를 정위로 3000여명의 지휘원과 전사들로 조직되였다.
조선의용군 3지대는 직접 주덕해의 지휘밑에 할빈해방전투에 참가하였다. 할빈에 들어온 다음에도 할빈시 경위임무를 담당하였고 중공동북국과 동북행정위원회, 송강성위와 송강군구, 할빈시위와 정부의 경위임무를 맡았으며 토비숙청, 토지개혁, 조선민족간부 양성 등 조선인들을 이끌어 해방전쟁에 참가시켰다. 1946년 7월 22일 할빈에서 건립된 북만지구조선인민주련맹은 주덕해와 전경호의 지도하에 할빈시와 북만지구의 조선인들을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신민주주의 혁명으로 이끌었다. 이와 같이 할빈은 북만지구 조선인의 정치, 군사, 경제, 문화중심지가 되였다.
일본제국주의의 무조건투항으로 하여 36년간 일제식민지로 되였던 조선이 광복을 맞이했고 조선민족은 해방을 맞이하였다. 이런 기쁨을 안고 할빈에 이민왔던 수많은 조선인들은 조선으로 고향으로 돌아가기 시작하였다. 당시 압록강과 두만강의 국경선을 마음대로 드나들 때라 1945년말부터 1947년말까지 많은 사람들은 수시로 마음대로 귀국하였다.
귀국 못하고 할빈에 남은 사람들은 대체로 러시아에서 이주하여 왔기에 러시아로 다시 갈수 없었고 할빈생활이 습관되였거나 생활기초를 닦아놓은 사람들, 오래동안 중국에서 생활하였기에 정이 든 사람들, 조선에서 소작농이거나 도시빈민으로 있다가 할빈에 왔기에 돌아갔댔자 아무 재산도 없고 생활해 나갈 방책이 없는 사람들, 징병으로 일본관동군에 나간 아들이 해방을 맞아 집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사람들, 해방이 되자 자식들이 조선의용군, 동북민주련군에 참군한 혁명군인가족들, 조선인들에게 토지를 나누어주었기에 안정된 생활이 보장된 교구농민들이였다.
이리하여 할빈시 조선인 인구는 1946년초의 2만97명으로부터 1947년에는 약 6000명으로, 1948년 5월에는 737호 3099명으로 대폭 줄어들었다. ‘할빈특별시조선인회 실태조사총결서’에 의하면 737호의 직업을 보면 공업에 130호, 상업에 87호, 교원 24호, 직원 54호, 기사 6호, 의사 7호, 려관 18호, 투기 15호, 기타 122호, 나머지는 농업에 종사하였다. 그들의 생활형편을 보면 당시 도리구, 신양구, 남강구, 마가구, 도외구에 거주하는 397호 도시 주민 가운데 좀 부유한 자 40호, 생계를 유지할수 있는 자 180호, 비교적 곤난한 자 154호, 극빈자 23호였다.
1945년 8월 19일 소련군이 할빈에 들어와 소련군 위수사령부를 성립하고 할빈시에 대한 군사관제를 실시하였다. 소련군은 소련에서 할빈에 돌아온 전 동북항일련군의 지도자 리조린장군을 빈강성 부성장으로 임명하였다. 리조린장군은 “항일련군할빈판사처”를 내오고 공산당의 혁명사업을 전개하였다. 이와 동시에 중공중앙동북국에서는 종자운, 왕건중 등 20여명의 간부를 할빈에 파견하였다. 종자운은 할빈에 온후 리조린과 손을 잡고 그해 10월 중순에 “중국공산당빈강지구사업위원회”를 성립하고 종자운이 서기로 되었다.
조선인의 귀국과 대우 문제에 대하여 1945년 10월 25일 중공빈강지구 공작위원회 ‘전체동포에게 고하는 글’에서 “조선인민에 대하여 우리는 끝없는 동정심으로 그들의 민주와 독립을 얻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그중 가장 나뿐분자는 중국의 한간과 마찬가지로 제재하여야 한다. 광범한 조선인민에 대하여서는 귀국을 원하는 자는 귀국하도록 보내주고 중국경내에 거주하고저 하는 자는 중국인과 동등한 대우를 하여주어야 한다.”고 중공의 원칙적인 방책을 제시하였다.
조선독립동맹북만특별위원회는 1945년 8월 20일 만몽호텔에서 회의를 열고 할빈주변 각현에 조선독립동맹 조직을 확건하고 조선인 청년들을 동원하여 무장대오를 조직할것을 결정지었다. 김택명은 리조린장군과 손을 잡고 중공빈강지구공작위원회의 무장조직인 할빈시보안총대에 조선인 독립대대를 건립하도록 하였다. 김택명이 조선독립대대 대장으로 임명 되였다. 처음 4―500명으로 조직된 이 무장대오는 당의 깊은 신임을 얻고 중공송강성사업위원회와 송강성군구, 할빈시 당, 정, 군 기관을 수호하는 중요한 임무를 담당하였다. 이 조선인 독립대대는 후에 건립한 조선의용군3지대의 기초로 되였다.
할빈을 군사관제 하고있던 소련홍군은 “얄타협정”에 의하여 1945년 11월 22일 할빈시를 국민당 접수대원들에게 넘겨주었다. 1946년 4월 28일 중공당이 할빈을 해방시킬 때까지 약 반년동안 할빈시의 실권은 소련군이 가지고있었지만 행정상으로는 국민당이 통치하였다. 이에 따라 할빈시에는 국민당계통의 조선인단체로서 대동민주당, 고려청년단이 있었고 무장조직 으로 한국청년수련대가 있었다. 그리고 국민당은 조선인가운데 밀정과 특권대원을 발전시켜 조선독립동맹, 조선의용군3지대에 대한 파괴활동을 하였다.
해방전쟁시기는 조선인이 중화인민공화국의 성원으로 되는 한개 과정이였고 한개 단계였다. 1946년 8월 7일 동북 각성대표련석회의가 할빈에서 5일간 진행되였다. 그번 회의에서 통과된 ‘동북각성민주정부 공동시정강령’제8조 소수민족문제에 있어서 “조선인에 대해서는 보호하고 중조우의를 촉진한다”고 하였다. 많은 대표들은 토론중에서 입적한 조선인은 응당 중국소수민족으로 대우하고 입적하지 않은 조선인도 항일련군과 민주련군의 공적이 크다는것을 지적하였고
또 동북에로의 이주력사가 백여년이 되는것으로 “사실상 그들은 동북인민이다”라는 의견이 일치되였다고 8월 24일《인민신보》가 보도하였다. 그번 회의에서 동북 각 성행정련합판사처 행정위원으로 립풍, 고승민, 풍중운 등 27명이 피선되였는데 그중 조선인으로서 수녕성군구정위 김광협(그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 보위상으로 있었음)이 선출되였다. 그리고 9월 7일 동북행정위원회 제3차회의에서 동북행정위원회 산하에 민족위원회를 두기로 결정하고 4명 위원을 임명하였는데 조선인으로서 김광협이 임명되였다.
1949년 8월 22일 동북인민대표대회가 할빈에서 열렸다. 그번 회의에서 통과된 ‘동북인민정부시정방침’에는 “중국공산당이 주장하는 국내 각 민족일률로 평등하다는 원칙을 견결히 관철하여 전 동북경내 한족, 몽골족, 회족, 조선족등 각 민족 인민들이 단결할 목적에 도달하여야 한다”고 씌여있다. 이번 회의에서 조선족으로서 주덕해가 동북인민대표로 피선 되였다.
이와 같이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하기전에 할빈과 전 동북에 거주하고있는 조선족은 “동북인민” “동북소수민족”의 대우를 받았다. 할빈에 있던 조선의용군 제3지대는 동북민주련군 송강군구 독립8퇀으로 개편되였다. 할빈시교구 고향툰, 동과수, 신향방, 성고자의 조선인 농민들은 토지개혁을 거쳐 토지를 분배받고 토지소유권을 가졌다. 조선인 민운공작대 대원들은 국가간부로서 할빈시인민정부 민정국, 재정국, 위생국 등 정권부문에 배치되여 사업하게 되였다. 조선인 군중단체로서“조선인회”를 내오고 전시 조선민족사업은 할빈시인민정부 민정국에서 구체적으로 지도하였다.
/서명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