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만주국시기 할빈은 철도와 수로교통의 중심지였고 물산의 집산지였으며 큰 상업도시였다. 일본, 러시아, 영국, 미국, 독일, 프랑스 등 33개 나라의 자본가들은 할빈에 수많은 공장, 상점, 회사, 은행을 개설하였다. 특히 일본의 경제세력이 할빈에 몰려들어와 할빈의 경제명맥을 틀어쥐었다. 이런 경제환경속에서 조선인의 경제는 상공업을 위주로 한 중소기업들이 날이 갈수록 늘어났고 조선인 다수는 도시 소시민의 생활을 유지하였다.
1933년에 할빈에서 출판한 '할빈대안내', 1936년에 출판한 '할빈상공명록', 1938년에 출판한 '할빈경제년감', 1941년에 출판한 '할빈상공명록' 등 력사사료에 의하면 조선인이 경영하는 각종 경제실체는 다양하였고 제일 많은것이 상공기업들이였다.
우선 제일 많고 민족특색이 있는것이 음식업이였다. 수십개의 크고 작은 식당, 료리점, 랭면옥, 개장국, 술집이 각 구에 널려져 있었다. 비교적 이름난 곳으로 반도랭면옥, 평양식당, 은세게, 해신관, 북일관, 항해루, 대성관, 송강관 등이 있었다. 도리구 일면가 한 거리만 하여도 빈강관, 평양관, 동양관, 할빈관, 방성각, 운산루, 부용루, 방원루 등 8집이나 되였다. 할빈에서 제일갑부로 불리는 한광숙이는 중앙대가3호에 상해반점이라는 큰 댄스홀까지 꾸렸다.
려관업을 경영하는 사람들도 비교적 많았다. 할빈시에 수십개의 조선려관들이 있었고 수많은 하숙집이 있었다. 좀 규모있게 경영하는 려관으로서는 할빈려관, 조선려관, 태평려관, 흥아려관, 조만려관, 일선려관, 대북려관, 금광려관, 복순려관 등이 있었다. 그중 김국제가 경영하는 할빈려관이 객실을 50개나 가지고 있어 조선인 려관으로서는 제일 큰 려관이였다. 김국제는 할빈 조선인 려관조합의 조합장으로 조선인 려관업의 대표자였다.
상점으로서는 미곡, 농구와 정미기를 판매하는것이 조선인농민들과 련게되여 있었다. 미곡소매상점으로 리명훈이 경영하는 흥하리승기, 박의양이 경영하는 서만산업사, 박명진이 경영하는 동풍태, 박시욱이 경영하는 반도상회 , 박명진이 경영하는 동풍덕, 립중건이 경영하는 한림양행, 김종금이 경영하는 사경사회, 리태명이 경영하는 영풍호, 최히송이 경영하는 삼강호, 신기영이 경영하는 삼익상회, 정준봉이 경영하는 동성장, 호거히가 경영하는 풍산상회 등이 있었다. 농구용품상점으로서 김성환이 경영하는 56사회지점, 옥명전이 경영하는 농공상사기계부 , 김서종이 경영하는 북만농구주식회사 등이 있었다.
병원 약국으로서 박돈하가 경영하는 대동의원(도리 외국7도가 14호), 리종익이 경영하는 북만의원(도외 순화가), 김두종이 경영하는 제세의원(도외 순화가), 김기동이 경영하는 공례의원(도외 5도가), 조동한이 꾸리는 박애의원(도외 16도가), 최종봉이 경영하는 두산병원(도리 신양구) 등이 있었다. 약국으로서는 8구 허공로 124호에서 탁춘봉이 꾸리는 동경당 대약방을 비롯하여 대동아제약소, 춘강약방, 한일약방, 신양약방 등이 있었다.
기타 업종들도 있었다. 토목건축공사로 고광웅이 경영하는 고광공무사가 도리 고사가 24호에 있었다. 중개업 부동산으로 박병문이 경영하는 삼화상사가 도리 중국9도가 30호에 있었다. 변호사업으로 김형순이 경영하는 김태법률사무소가 도리 중국4도가에 있었고 최근이 경영하는 최근사무소(대서업)가 도리 매매가 31호에 있었다. 이외에도 조선인 택시조합에 100여대 택시가 있었고 마차 인력차조합에도 박백명등 여러 사람이 참가하고있었다.
공장기업은 주로 제조공업이였다. 가장 특징적인것은 조선인의 수전농업과 갈라놓을수 없는 정미업이였다. 정미업자로서 김영백이 경영하는 북만사업사(도리 수도가 21호), 박의양이 경영하는 선만상업사(8구 남마로남강가 5호), 박명진이 경영하는 동풍대(도외 대수정가 53호), 송을동이 경영하는 태기정미공장(8구 남마로남강가 4호), 최히송이 경영하는 삼강호(8구 남안가 1호), 양재칠이 경영하는 동아정미소(8구 남하가 1호), 향방에서 김만제가 경영하는 익태호정미소 등이 있었다.
할빈은 전 중국에서 맥주소모량이 제일 큰 도시이다. 1900년 할빈에 첫 맥주공장이 건립되여서부터 1945년까지 할빈에는 맥주공장이 모두 8개 있었는데 그중 조선인 맥주공장이 하나 있었다. 1933년 조선인 김기섭이란 사람이 남강 마가구 문창가 138호에 오렌다루맥주공장을 세웠다. 그후 1939년에는 김승만이란 사람이 이 공장을 경영하게 되면서부터 동양맥주공장으로 이름을 갈았다. 공장설비로서 전발효못 (前发酵池)이 7개, 후발효통이 24개, 총용량이 1650리터이고 맥주를 병에 쏟아넣는 주입기 한대가 있었다. '할빈맥주공업사'에 의하면 이 공장의 년생산능력은 100만병이였다(할빈 8개 공장의 총생산량은 1400만병이였는데 큰 비례를 차지하고있음). 공장의 종업원은 22명으로 할빈시 조선인 공장으로서는 비교적 큰 공장이였다. 당시 맥주가격은 2급품으로 한병에 28전씩 하였다. 맥주제조에 쓰는 원료인 보리는 목란현과 송화강하류지구에서 생산한것을 쓰고 호프(酒花)는 일면파에서 생산하는 당지 원료를 썼기에 성본이 낮아 효익이 좋았다. 이 공장은 1945년 해방될 때까지 경영하였으며 해방후에는 조선의용군 3지대에서 접수하여 군비에 보탰다.
이와같은 상공업자 외에 할빈의 조선인가운데는 중소학교 교원, 기관의 사무원, 각 업종의 기술자도 있었다. 가장 많은것이 로동자였다. 1938년 '할빈경제년감'에 의하면 로동자들의 로임은 하루(8시간)에 목공이 최고 250전, 최저 150전, 전공이 최고 250전, 최저 150전, 재봉공은 최고 250전, 최저 1원, 건설공(벽돌공, 미장공, 기와공 등)은 최고 250전, 최저 150전, 신발공은 최고 250전, 최저 1원이였다. 그러나 일본인 로동자들은 목공 최고 5원, 최저 3원이고 전기공 최고 5원, 최저 3원 등으로 모든 업종에서 모두 곱으로 로임을 받았다.
1942년 1월 1일부터 할빈시에서는 생활필수품 배급제가 실시되고 5월 1일부터는 미곡배금제가 실시되여 물가는 해마다 올랐다. 1944년 '할빈상공공회회보'에 의하면 그해 1월달 물가는 입쌀 한근에 22전, 밀가루 한근에 28전, 좁쌀 한근에 11전, 수수쌀 한근에 9전이였다. 부식품으로 감자 한근에 13전, 배추 한근에 22전, 소고기 한근에 1원13전, 돼지고기 한근에 1원44전, 닭고기 한근에 2원75전, 두부 한모에 10전, 계란 10개에 2원60전, 콩기름 한근에 48전씩 했다. 하루 최저로임 1원50전이면 입쌀 6근8량, 좁쌀 13근6량, 감자 11근반, 배추 6근8량을 살수 있어 5식구라해도 먹는것은 해결된다. 그러나 집세를 물고 옷견지를 사입고 자식 교육비를 지불하고나면 생활해나가기가 매우 어려웠다.
/서명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