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 김호림 특별기고
(흑룡강신문=하얼빈) 어느 영화에 나오는 시간여행을 하면 그럴까 싶다. 버스터미널의 저쪽에 신라정부가 있었다. 이 신라는 일찍 진晉나라 태강(太康) 3년(282) 대륙에 나타나고 있다고 한다. 반도에서 신라가 건국한 후 200여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시내 동쪽의 강가에 있는데요, 걸음이 빠르면 30분 정도면 닿을 수 있어요." 기차역의 도우미는 일행에게 이렇게 신라정부의 위치를 설명하고 있었다.
물론 도우미가 말하고 있는 기차역은 타임머신 저쪽이 아닌 2016년 10월의 세계이었다. 늦은 가을의 북방에서는 낙엽이 소슬하게 날리고 있었지만 이곳 남방에서는 푸른 잎사귀가 빗방울에 춤추고 있었다. 싯누런 흙탕물만 뒤섞인 용진하(龍津河)가 시내를 용용하게 흘러 지나고 있었다.
용진하 기슭에 강물을 진압하는 옛 풍수비보탑이 있다.
용진하는 복건성(福建省) 중부 용암시(龍岩市)의 '어머니의 강'으로, 대륙 남방 지역의 최초의 용 문화의 상징이라고 한다. 신라의 이름을 개명한 용암도 이와 마찬가지로 용바위가 승천한 바위에서 붙어진 지명이다. 옛날 용진하와 용암은 모두 대륙 남방의 용 문화의 발상지였다. 용암은 용의 고향이었고 용의 부호(符號)로 되고 있었다. 그때 현지의 토착민들은 현성 동쪽 취병산(翠屛山) 기슭의 용암동(龍岩洞)을 용암현으로 개명할 것을 조정에 상서(上書)했다고 한다. 이에 따라 천보(天寶) 원년(742), 당(唐)나라 명황(明皇)은 직접 신라현을 용암현으로 개명했다. 천자가 직접 만든 이름이라고 해서 그럴까, 용암은 미구에 중국에서 유일하게 '용'으로 명명한 지방행정구역의 시(市)로 되었다.
그러나 유명한 지명의 용암동이라고 해서 다 아는 게 아니었다. 헛걸음을 몇 번 걷다가 웬 촌민의 안내로 용진하 건너 쪽 산기슭의 표지판을 찾을 수 있었다. 용암동은 마을 사이에 끼어 있는 작은 산길을 걸어야 했다.
용암동은 이 길가에서 오른쪽 오솔길로 산을 올라가야 한다.
"예전에는 숲길이었는데요, 언제인가부터 마을이 자리하고 있어요." 촌민은 이렇게 일행에게 말했다.
산중턱에 있는 용천사(龍泉寺)도 기실 8,9년 전에 비로소 일어섰다고 한다. 나중에 용천사의 비구니 스님이 소개한 이야기였다.
용암동은 용천사의 바로 동쪽의 산속 숲에 있었다. 말이 용암동이지 용암동 예전의 크기의 반의 반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지난 세기 60년대, 현지 시멘트공장에서 채석을 하면서 용암동의 전동(前洞)과 후동(後洞)을 폭파했다고 한다. 그들이 지속적으로 중동(中洞)을 폭파하려고 할 때 동굴 기슭의 사원에 있던 비구니와 거사가 극력 방애해서 보존되었다는 것이다.
잔존하는 용암동은 땅속의 집 한 채 크기였다. 핸드폰의 액면 불빛에 암벽의 문자가 나타났다. 명明나라 때 용암 태생의 관원 왕원(王源, 1376~1455)이 쓴 산문(散文)으로 용암동의 최초의 문자라고 한다. 산문 '용암기(龍岩記)'는 취병산 기슭의 용진하를 넘어 용암동에 왔던 이야기를 동굴의 암벽에 새겼다고 한다. 이 기록에 따르면 동굴에는 청백색 무늬의 용이 있으며 또 누른 색 비늘의 용이 있었다.
남방의 습윤한 날씨는 동굴 꼭대기에서 물방울을 방울방울 떨어뜨리고 있었다. 누군가 물방울처럼 말 한마디를 동굴의 땅바닥에 떨어뜨린다. "동굴의 용은 오랜 세월을 흐르면서 물방울이 만든 조화이네."
산비탈의 땅밑에 있는 용음동, 예전의 일부밖에 남지 않았다.
천정에서 용이 몸을 꿈틀거리며 동굴 어구로 머리를 내밀고 있었다. 왕원이 글에서 밝힌 많은 용은 동굴을 폭파할 때 파괴되어 소실되었다고 한다. 우리가 동굴에서 볼 수 있는 그림은 이미 바뀐 그림이었다. 용천사 부근에 생긴 용왕묘(龍王廟)와 공자묘(孔子廟) 그리고 암자 역시 몇 년 전에 옛 그림을 지우고 새로 만든 것이었다. 그러고 보면 주객이 뒤바뀌고 손님이 주인보다 떠들썩하고 있는 모양새가 된 것이다.
사실상 중원에서 남쪽으로 이주한 선민들은 오래전에 벌써 남부지역의 주인으로 되고 있다. 이런 한족(漢族) 선민들은 부동한 부족에서 생활하면서 서로 방언이 다르지만 어원은 모두 중원의 동일한 옛 언어라고 한다.
대륙의 신라인도 반도의 신라인과 방언이 다를지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두 지역의 지명만은 원서(原書)에서 베껴낸 것처럼 동일했다. 한국의 충청북도 청주에도 동명의 지명인 용암동이 있다. 옛날 신라는 청주에 진출하여 삼국통일의 지반을 마련, 용암동의 주인이 되고 있었다.
혹여 바다 건너 서로 천리나 상거한 동명의 지명에 무슨 인연이 있을까. 용암 지명은 용이 승천한 바위에서 붙어진 이름이듯 두 신라 마을의 지명에는 모두 포유동물 소가 살고 있다. 용암동이 있는 반도의 청주에 와우동(臥牛洞)이 있듯 신라가 있는 대륙의 용암에 신비한 소가 있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당(唐)나라 개원(開元) 말, 신라 관아의 장관 손봉선(孫奉先)이 전하고 있다고 '태평환우기(太平寰宇記)'가 기록하고 있다. 송(宋)나라 태종(太宗) 태평흥국(太平興國, 976~983) 연간에 있은 '태평환우기'는 손봉선이 대낮에 큰방에서 비몽사몽에 신비한 소를 어렴풋이 만났다고 말한다. 이 신비한 소가 말하기를, "나는 신라산(新羅山)의 신인데, 당신의 큰방에서 소먹이를 구하는 바이요." 이 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 신라는 소가 있는 산의 이름이다. 지방 문헌인 '정주부지(汀州府志)'도 "…신라는 산의 이름이다."고 말하고 있다.
산은 움직일 수 없지만 마을은 소처럼 자리를 뜨고 있었다. '정주부지'의 기록에 따르면 "(신라산은) 장정(長汀)의 서쪽에 있다. 진(晉), 당(唐)은 이 산으로 현 이름을 만들었다. 오늘의 용암성이 아니다."
"진안군(晉安郡)은 진나라 태강 3년(282)에 설치, 8개의 현을 예속하고 있었으며 그 중의 하나가 신라현이다."라고 당나라 때 편찬한 '진서(晉書)'가 '지제오(志第五)'에 기록하고 있다. 후대에 교간(校刊)된 '진서'는 이에 또 "신라성은 정주부(汀州府)의 동남에 있다"고 주해를 달아놓고 있다. 정주는 현재의 장정 지역을 말하니, 장정의 동남쪽에 신라성이 있다는 말이겠다. 일부 한국 학자는 동남쪽에 있는 지명 신교(新橋)와 나방(羅坊)을 거론, 신라현의 위치가 바로 이곳에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지명 나방의 경우 마을에 나씨 성이 대부분이라고 해서 생긴 이름이며 신라 지명과 관련이 없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지방 문헌인 '정주현지(汀州縣志)'는 신라성의 방위를 '진서'와 달리 해석한다. 이 현지(縣志)는 신라 현성은 "장정 현성 북쪽 5리의 동방(東坊) 대구도(大丘頭)에 있다"고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는 것. 이에 따르면 옛 신라현은 오늘날의 초평(草坪) 일대에 위치한다. 당나라 개원(開元) 21년(733) 인구가 늘어나면서 오늘의 상항현(上杭縣) 일대의 신라현 소속 신라구(新羅口)에 신라현을 설치했다. 개원 24년(736) 진나라 신라현의 고초진(苦草鎭) 즉 장정현의 제일 남쪽인 용암 성관(城關) 일대에 신라현을 옮겨갔다. 뒤미처 8년 후의 천보 원년에 신라현은 용암현으로 개명했다. 신라 옛 성이 장정현 북쪽의 아닌 남쪽에 있었다고 하는 낭설은 이 훗날의 지명으로 인해 나온 것이다.
신라성은 미구에 소처럼 발이 달린 듯 또 한 번 지명을 바꾼다. 1997년, 용암 지역이 지급(地級) 시로 되면서 현급(縣級) 용암의 옛 시 구역은 신라구(新羅區)로 개칭했다.
신라구 정부 청사의 현시판 이름.
결국 용암에 남고 있는 신라현의 잔상(殘像)은 실상이 아닌 허상으로 되고 있는 것.
신라현의 이름을 만들었다고 하는 신라산 역시 이처럼 다른 곳에서 나타난다. 용암에서 북쪽으로 약 800㎞ 상거한 절강성(浙江省) "임해현(臨海縣)의 서쪽 30리에 신라산이 있다"고 청(淸)나라 때의 '대청일통지(大淸一通志)'가 기록하고 있다. 당․송 때 생긴 지명이라고 하지만 우연인지 필연인지 임해현 신라산의 부근에도 마침 소의 지명이 있다. 3대 중국 여행기로 일컫는 '표해록(漂海錄)'은 조선 시대의 최부(崔簿, 144~1504)의 표류기인데, 그가 5백 년 전인 1488년 고향으로 항해하던 도중 갑작스레 태풍을 만나 14일간 표류하다가 구사일생으로 임해현 우두외양(牛頭外洋)에 표착한다고 기술하고 있다. 우두외양은 임해현 서쪽 바다의 우두산(牛頭山)에 근접한다고 해서 생긴 이름이다.
참고로 임해 일대에는 신라 이름의 촌과 산, 섬이 복수(複數)로 존재하고 있었다. 기전체 역사서 '삼국사기(三國史記)'는 신라 문무왕 15년(675) 태종의 둘째 아들 김인문(金仁問)이 당나라로부터 임해군공(郡公)의 봉작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대륙 연안의 지역 임해가 바다 건너 신라와 특수한 연계를 갖고 있다는 얘기가 된다.
신라산이 있던 장정의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자. 장정은 용암의 바로 북쪽에 상거한 복건성의 오지이다. 서쪽으로 광동성(廣東省), 북쪽으로 강서성(江西省)을 이웃하면서 옛날에는 복건성 5대주의 하나로 되었다. 세 지역을 인접한 대동맥으로 되고 있으면서 서진(西晉, 265~317) 이래 남쪽으로 이주하는 중원의 한인들을 계속 받아들였다. 당나라 때부터 청나라 말까지 주와 군, 부의 치소(治所)였다. 천하의 물은 동쪽으로 흐르는데, 남쪽은 위치가 장정 정(丁)이다. 옛날 군(郡)의 이름을 위치이자 강 이름의 '정주(汀州)'로 취한 원인이다.
정강(汀江)은 강의 이름으로 지명을 만들듯 수상운수의 역사가 오래다. 옛날부터 배들이 노를 저어 나들었다. 20세기 50년대까지 정강의 배의 통로는 120여㎞에 달했다고 한다. 그러나 60년대 말 정강에 둑을 만들면서 수상운수가 점차 줄어들었다.
장정 옛 성의 일각.
아무튼 신라인들이 중원의 한인처럼 오지의 정강에 진출하고 신라산의 지명을 만들 정도로 군거하고 있을 이유를 이해할 수 있겠다.
실제로 신라는 조선기술이 발달하여 대륙에 널리 진주했으며, 이 기록은 일본 승려 엔닌(圓仁, 794~864)의 기행문인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와 이에 약간 앞선 일본의 사서 '속일본기(續日本記, 697~791)'에서 읽을 수 있다. 대륙의 고서인 '구당서(舊唐書)'의 기록에 의하더라도 신라인이 건조한 배들은 대륙 복판의 양자강 나루터를 장악하고 수만 척의 배들이 주야로 왕래하며 교역을 했다고 한다.
신라인들은 여기저기 군락을 이뤄 신라방, 신라촌을 만들었고 산에 무덤 떼를 이뤄 신라산을 만들었다. 촌락을 이루면 주변에 사찰을 만들었다. 용암의 관음암(觀音庵)도 처음에는 주변의 인가가 모여 마을을 이뤘다가 훗날 암자를 설립한 경우이다. 관음은 청나라 시기 남해 보타산(普陀山)의 법사에 의해 '원통사(圓通寺)'로 개명한 후 사찰의 이름으로 전승되어왔다. 그러나 원통사의 역사는 관음암부터 시작하더라도 당나라 때의 일이며, 신라인은 이보다 여러 조대를 앞선 진나라 때 벌써 용암 지역에 진출하고 있었다. 현존하는 다른 고찰 역시 주변에 10여개나 되지만 모두 당나라 때부터 송(宋)나라, 명(明)나라, 청나라 때 설립된 도장이며 웬 일인지 신라마을에 있어야 할 신라 사찰이나 신라인 승려는 나타나지 않는다.
신라 구정부에 있는 상가의 일부.
신라사는 도무지 흔적을 찾을 길 없지만 용의 고향에 그냥 옛 종소리를 울리고 있었다. 용암의 신라구(新羅區)에는 신라의 관아가 있고 신라의 상가가 있었으며 신라의 병원이 있었다.
용암에서 완행열차에 오르면서 길에서 길을 물었다. 새 신라를 떠나 옛 신라로 가려면 얼마 걸릴까…나중에 보니 장정 현성까지는 단 1시간 30분 만에 금방 도착하고 있었다. 천 년 전의 신비한 소는 실은 그의 영각소리가 귓가에 들릴 듯 가까운 곳에 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