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8년 6월 주문빈은 조각장탄광의 로동자 규찰대 대장 절진국을 중심으로 130명의 로동자항일무장대오를 건립했다. 광부들로 조직된 항일무장대오는 여러 차례의 전투를 거쳐 3000여명으로 늘어났다. 당에서는 이 부대를 기동항일련합군 특무대대로 명명하였다.
일제는 대량의 병력을 동원하여 이 부대를 소멸하려고 하였다. 이때 이 무장대오는 7000여명으로 늘어났다. 개란탄광로동자들의 줄기찬 투쟁은 기동지구 광범한 농민들의 반제투쟁을 크게 고무했다. 1938년 7월 20일까지 전 기동 22개 현에서 20만 인민이 참가한 대봉기가 일어났다.
1938년 8월, 주문빈이 령도하는 봉기부대의 대표와 팔로군의 등화가 지휘하는 종대의 책임자들이 철창에서 련석회의를 가지고 당중앙의 방침에 따라 기찰열료군구의 산하 4개 군분구를 합병하여 통일적인 군사지휘부를 설립하였는데 주문빈은 기찰열료군구직속 팔로군 기동유격지대 정치부 주임으로 임명됐으며 1939년에는 중국공산당 기동동부지구 위원회 서기사업을 겸하였다.
기동은 동북과 관내 화북을 이어주는 요충지에 위치해 있기때문에 그 전략적 지위가 매우 중요하다. 1937년 일제가 전면적인 중국 침략전쟁을 발동한 이후 적의 깊숙한 후방, 교통요지에 위치한 기동 항일유격근거지는 더욱 중요하게 되였다.
기동유격근거지를 목에 걸린 뼈처럼 생각한 놈들은 3만여 괴뢰군을 끌어 모아 유격근거지에 대한 토벌과 소탕을 감행하였다.
근거지를 확보하려면 적들과 싸워야 했다. 주문빈은 적 치안군을 소멸할 주장을 내세우고 1941년 11월부터 1942년 2월까지 기동의 항일부대를 집중해 적의 치안부대 섬멸전을 조직하였다. 11월 15일 준화 40리포의 첫 전투에서 4백 여명 적들을 소멸하였고 그 후 23차의 전투를 거쳐 유격대는 치안군 2,700여명과 왜병 300여명을 소멸하였다.
1943년 3월에 주문빈은 중국공산당 기동특별위원회 조직부장 겸 중공란중지위 서기로 임명되였다. 7월에 기동특별위원회는 기열변특위로 개칭되고 특위아래에 5개 지구위원회와 5개 전원공서를 두었는데 주문빈은 특위 조직부장으로 선거되여 특위기관을 지도했다. 다년간의 간고한 전투를 거쳐 1944년 20만 민병을 가진 완정한 기열료항일근거지가 형성되였다.
1944년 10월16일 주문빈은 풍윤현 양가포포위돌격전에서 머리에 중상을 입고 장렬히 희생되였는데 그때 그의 나이는 36세밖에 안되였다. 주문빈동지가 희생된후 류소기는 《문빈동지는 중조 량국인민의 훌륭한 아들이며 우리당 우리군의 용맹한 장령이였다. 그가 일찍 희생된것은 우리 당의 큰 손실이 아닐수 없다》면서 애석해했다.
중공당산시위 당사연구실에서 편찬한 기동혁명사에는 주문빈을 다음과 같이 기재했다.
《주문빈,그는 기동항일 폭동과 기동항일근거지 건립, 기동항일전쟁 및 근거지와 기동지방당조직 건설에서 중요한 공헌을 했다. 특히 그토록 잔혹한 투쟁환경속에서도 시종 군중들속에 뿌리박고 기열변구의 인민과 간부들의 애대를 받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