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룡강신문=하얼빈) 러시아와 강하나를 사이둔 동녕현 삼차구조선족진 삼차구촌에서는 흥변부민의 차원에서 촌민들의 거주환경개선을 바싹 틀어쥐여 기꺼운 성과를 올렸다. 570세대가 몽땅 벽돌기와(양철지붕을 포함)집에 들었고 8000여미터에 달하는 마을 구간의 시멘트길을 닦고 마을에 가로등을 설치하여 촌민들은 도시생활에 못지 않는 문화생활을 누리고 있다.
1948년 3월 상급부문의 지시에 따라 김룡익, 윤석현 등 촌간부들이 80여세대 농민들을 이끌고 삼차구에다 개척의 첫 보습을 박았다.그들은 낮이면 모기떼가 성화를 부리고 밤이면 늑대울음소리가 간담을 써늘케 하는 렬악한 환경속에서 토스레를 입고 두병밥을 먹으면서 억척스레 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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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벽돌집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삼차구촌의 모습. |
벽돌이 없어 일본침략군들이 버리고 간 낡은 관사집 벽에다 대수 나무를 얹고 집을 지었으며 그것도 없는 집에서는 아예 땅굴을 파고 비와 추위를 막았다. 집체화를 실시한후 비록 거주환경개선에 대한 촌민들의 욕망은 컸으나 그때 계획경제의 쇠사슬에 얽매이다보니 새집들이는 그림의 떡이였다.
개혁, 개방후 삼차구촌 지도부에서는 촌민들을 적극 부추켜 수백명의 청장년들을 러시아,한국과 연해지구로 내보내여 돈을 벌게 하였다.
촌민들은 잠에서 깨여난 호랑이처럼 시장경제의 급류에 뛰여들어 인구당수입을 호도거리전의 100여원으로부터 8400여원으로 끌어올렸다.그후촌에서는 또 통일적으로 규획하고 자금,정책등 면에서 촌민들을 적극 부추켜 거주환경새선을 힘써 추진시켰다.
이리하여 90년대부터 해마다 50여세대가 새집들이를 하였는가 하면 어떤 촌민들은 외국에 가 배운 기술로 마을에 층집을 짓고 상수도,하수도,화장실 등 설계가 구전한 아파트단지를 세우려고 준비를 다그치고 있다.
/리삼민 특약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