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룡강신문=하얼빈) 60여년전 우리가 살던 시골(지금의 해림 신안진 공제촌)이 해방되던 1945년에 부모님과 우리 6남매가 함께 살던 집은 찌그러져가는 초가집으로 작은 비만 내려도 대야, 사발들이 구들을 차지하고 전 가족은 벽 한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비가 멎기를 기다려야 하는 볼품없는 오막살이집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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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가 거주하고 있는 아프트와 공원같은 뜨락의 일각 |
그후 지주를 청산하고 토지를 분배하던 그 시기에 우리 집은 천지개벽의 변화를 가져왔다. 꿈에도 생각지못한 지주집의 반칸짜리 집이 빈고농이였던 우리에게 차례졌던것이였다.
하지만 얼마 안되여 우리 일가는 둘째형님의 사업터를 따라 해림시의 신안진에서 벌리현성의 교구(지금의 벌리현 성서가)로 옮겼고 또 한동안 남의 초가집을 빌려 세집생활을 하다가 나중에 스스로 괜찮다고 하는 초가집을 하나 일떠세워 남부럽지 않는 거주환경을 마련하게 되였다.
그후 1962년 한달에 10원이란 인민조학금을 받아가며 철로대학을 나온 나는 성가해서부터 집이없어 이집저집 세집을 맡아가야 했으며 한해에 3곳이나 집을 옮기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물론 단위에서 집을 해결해주기를 기다렸는데 3년남짓이 되자 3평방미터밖에 안되는 십여호가 함께 붙어사는 '하모니카'식 단층 철로로동자주택이 차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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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세대 조선족부자집이 살고 있다는 목단강시 고급아파트단지인 '빈강도
시화원'의 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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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 지식인에 소수민족'이란 우대책으로 남먼저 해결된 주택이였다.비록 두 가정이 공동으로 주방 하나를 두고 쓰는 상수도만 있는 북쪽칸이였으나 그래도 행운스러운 편이였다. 물론 3평방미터밖에 안되는 구들은 단 2-3명만 누울수 있는 형편, 이불을 개여놓으면 놀자리도 없는 '토끼우리'같았지만 당시의 사회와 단위의 조건으로 보면 그래도 괜찮은 '수준'이였다.
1978년을 계기로 우리나라는 새 중국이 성립된후부터 개혁개방에 이르기까지 30년의 세월을 걸쳤고 개혁해방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또 30년이란 빛나는 려정을 경과했다.
1990년대 중반 중국의 경제건설은 큰 성취를 이루었으며 계획경제가 시장경제로 전환됨에 따라 출범된 주택개혁은 주민들에게 주택소비의 상품화의식을 키워주었다.
나도 주택개혁의 신선한 '춘풍'을 타고 면적이 70여평방미터인 작은 3개 방이 달린 아파트를 하나 마련하게 되였다. 예전 같으면 실내 장식에 엄두도 못냈지만 생활조건을 개선해야 한다는 요구가 높아짐에 따라 부득이 집안장식에 신경을 쓰야 했다. 하여 우리 집도 당시 실내장식재로는 첫손이 꼽히는 대만산 화려판(华丽板) 을 대량 구입해 실내장식을 했다. 그러나 막상 실내장식을 하고 나니 기분은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