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룡강신문=하얼빈)김대중 대통령은 1925년 한반도 남서쪽에 위치한 하의도(전남신안군)라는 외딴섬에서 태어나 '초암서당'을 거쳐 36년 육지로 전학,43년 목포상업학교를 졸업하였다. 그 후 목포상선회사에 잠시취업하였다가 사업을 시작하여 목포일보사와 목포해운회사 사장(48년)이 되기도 했다.
1950년 6.25 당시 목포에서 인민군에 체포되어 목포형무소에 투옥중 처형직전에 탈출하여'해상방위대'에 참가하여 전라도 지구 부사령관에 임명되어 후방에서 치안유지 임무를 수행했다.
그가 처음 정치에 처음 발을 들여놓은 것은 1952년 부산정치파동을 보면서 한국전쟁에서 하마터면 죽을 운명이었기 때문에 그 후 덤으로 사는 인생에서 조국과 민족의 미래를 위해 한 몸을 바쳐야 겠다고 생각한 때문이었다. 그래서 1954년 5월 사업을 그만두고 목포에서 제 3대 민의원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였지만 낙선하였다. 그 후 일시적으로 한국노동문제연구소 주간으로 일하다 1956년 장면박사의 권유로 민주당에 입당하여 민주당 대변인으로 활동하는 등 1960년 부터 그의 본격적인 정치인생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의 정치행로는 처음부터 순탄치 못했다. 61년에 3전 4기 끝에 강원도 인제 보궐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으나 5.16 쿠데타가 일어나 국회의원선서도 못한 채 의원직을 박탈당해야만 했다. 이후 박정희 군사정권하에서 여러번 체포되었다 석방되기를 반복하였으며 정치활동 정화법에 묶여 정치활동을 금지당했다.
63년 2월 정치활동 정화법에서 풀려나자 그 해 목포에서 제 6대 총선에 출마, 국회의원에 다시 당선되었다. 그는 연설을 잘하기로 유명했다. 일례로 1964년 4월 국회본회의에서 동료국회의원 구속동의안 상정을 지연시키기 위하여 한국의회사상 초유의 5시간 19분 동안 의사 진행발언을 한 기록을 갖고 있다.
1971년 처음으로 신민당 7대 대통령 후보로 박정희 전 대통령과 겨루었으나 약 1백만표 차이로 낙선하였다. 1972년 10월 유신이 선포되자 동경에서 반대 성명을 발표하는 등 강력히 저항하였다. 이에 위협을 느낀 박정희 정권은 김대중을 제거하기 위해 1973년 8월 동경 그랜드 팔레스호텔에서 납치하여 바다로 끌고가 수장시킬려고 했던 '김대중 납치사건'을 일으켰다. 그러나 미국과 일본정부의 적극적인 구명움직임으로 피랍 5일만에 구사일생으로 생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