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룡강신문=하얼빈)
김대중의 귀국은 국민들에게 일대 사건으로 받아들여졌다. 그 결과는 그가 김영삼과 함께 급조한 신한민주당이 제12대 총선에서 어용야당이던 민주한국당을 제치고 제1야당으로 부상한 데서 잘 나타났다. 그는 이에 힘입어 대통령 직선제 개헌투쟁을 본격적으로 전개했다. 1987년 6월민주항쟁의 물결이 전국을 뒤덮자 군사정권은 대통령 직선제 수용과 그의 사면복권을 뼈대로 한 이른바 6·29선언으로 후퇴했다. 비로소 사면복권된 그는 김영삼이 총재로 있던 제1야당인 통일민주당의 상임고문 자격으로 정치활동을 재개했다. 그러나 1987년 12월로 예정된 제13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김영삼과의 후보단일화에 실패하자 독자 출마로 방향을 돌려 11월 평화민주당을 창당해 대통령선거에 나섰다. 그러나 집권당인 민주정의당의 노태우 후보, 통일민주당의 김영삼 후보와 3파전으로 치러진 대통령선거에서 야당 후보가 승리할 가능성은 당초부터 없었다. 대통령선거에 패한 후 야당분열에 대한 국민적 비난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거세지자 그는 평화민주당 총재직을 일시 사퇴했다. 하지만 그에게 다시 기회가 왔다. 이듬해(1988) 4월에 실시된 제13대 총선에서 평화민주당이 통일민주당을 제치고 제1야당으로 부상한 것이다. 그는 다시 평화민주당 총재로 정치의 전면에 나섰다. 1990년 민주정의당·통일민주당·신민주공화당의 '3당 합당'은 정국을 송두리째 흔들어놓았다. 자신의 강력한 지지기반인 호남 고립화 전략으로 요약되는 이 사태는 그에게 새로운 시련을 안겨 주었다. 그는 3당 합당으로 출범한 거대여당인 민주자유당(약칭 민자당)에 대항하기 위해 1991년 4월 재야인사 중심의 신민주연합당준비위원회(약칭 신민연)와 통합해 신민주연합당(약칭 신민당)을 창당하고 9월에는 김영삼의 3당 합당에 반대해 소수야당으로 전락한 민주당과 합당했다.
1992년 12월 18일 그는 제14대 대통령선거에 다시 출마해 국민들의 지지를 호소했다. 그러나 호남지역의 압도적인 지지와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에서의 우세에도 불구하고 그는 민주자유당의 김영삼 후보에게 190만여 표차로 패배했다. 그는 1993년 1월 영국으로 출국해 연구활동을 하다 6개월 만에 귀국했으며, 1994년 1월 아시아태평양평화재단(이후 아태평화재단으로 명칭 변경)을 창립해 이사장으로 활동했다.
/네이버1995년 6·27지방선거 과정에서 사실상 정치활동을 재개했고 9월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했다. 1996년 4월 11일에 실시된 제15대 총선에서 새정치국민회의가 제1야당의 지위를 굳히자 그는 오직 제15대 대통령선거를 향해 질주했으며, 1997년 11월 충청지역의 맹주로 자처하던 자유민주연합의 김종필 총재와 대통령 후보 단일화에 성공해 두 당의 단일후보로 대통령선거에 나섰다. 1997년 12월 18일 실시된 제15대 대통령선거에서 그는 여권후보의 분열과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를 불러온 외환위기를 등에 업고 여당인 한나라당의 이회창 후보를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