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룡강신문=하얼빈)=김택명은 동맹의 조직을 확대하는 동시에 청년들에 대한 선전교양사업을 매우 중시하였다. 동성농장에서는 ‘농민강습소’(야학)를 꾸려 청년활동의 진지로 삼고 ‘협화청년단’을 동맹의 선전도구로 리용하였다. 맹원 원용주를 강습소 부소장으로, 맹원 한탁주를 청년단 부단장으로 들여보냈다. 이렇게 함으로써 합법적형식을 리용하여 청년들을 각성시켰다. 김택명은 수시로 세계 반파쑈전쟁과 팔로군의 항일전쟁의 승리에 대한 소식을 맹원들에게 알려주었다. 그는 ‘소독전쟁과 국제정세’란 격문을 등사하여 맹원들에게 배포하였다. 이런 선전자료들을 매번 100여부씩 찍어 대부분은 다른 지방의 비밀련계인에게 어김없이 보내주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맹원들의 정치적 각성을 높였다.
1943년 겨울, 김택명은 12지부의 우수한 맹원인 김태원(18세)을 지하교통선을 통해 연안에 보내여 사업정황을 동맹총부에 회보하게 하고 거기에 남아 학습하게 하였다. 김태원은 그후 무정장군의 경위원으로 사업하였고 조선전쟁시기 조선인민군의 련대장으로 싸우다가 전선에서 희생되였다.
1944년 봄, 김택명은 동맹의 믿음직한 조경형과 김명(당시 김철준)을 조선에 파견하여 조선인민의 생활형편과 사상정황을 료해하고 일본군의 동태를 수집하도록 하였다. 조경형은 청진, 함흥, 흥남 등지를 돌며 그곳에서 같이 일하던 로동자와 친척을 만났다. 김명은 부산, 대구, 밀양 등지를 돌았다. 밀양은 김명의 고향이여서 친척과 친구들을 통하여 일제가 부산을 통하여 군대를 태평양전선으로 이동시키고 있다는 정황을 료해하여 연안에 있는 독립동맹 총부에 보고하였다.
1944년 가을, 김택명은 신분이 로출되여 동성농장을 떠나 할빈으로 옮겼다. 김택명은 할빈에 있으면서 각기 독립동맹활동을 지도했으며 유격근거지를 창설하고 일제와 무장투쟁을 전개할 준비를 하엿다. 제2차세계대전의 형세가 명랑해지고 독일의 패망이 예견된 1944년말 1945년초에 김택명은 교통원 김만선을 통해 김용진에게 형세보고를 보내였는데 명년, 즉 1945년전에 소련이 동북으로 진군할것 같으니 모든 맹원이 유격전으로 홍군의 진공에 배합해줄 준비를 갖추라는 구두지시를 했다. 이 정신에 근거하여 수화지부에서는 배낭을 준비하고 방한복, 소금, 성냥, 약간의 식량, 간단한 약품을 준비하였다. 상지지부에서는 약간의 무기도 준비하엿고 파언 동성지부에서는 이미 조경형, 김철준 등이 자위대의 무장을 장악하고 있었다. 1945년 5월 15일, 파언에 있는 독립동맹 제12지부 서기 조경형을 할빈 도리공원에 불러 중공제7차대표대회의 정신을 말해주고 소독전쟁은 소련의 승리로 끝났다는 국제정세를 설명해주었다. 그리고 소련이 불원간에 대일작전에 참가하게 될것이고 일제는 이 만주땅에서 최후발악을 할것이므로 신속히 청년들을 묶어세워 놈들의 손에서 무기를 탈취하고 유격전을 전개할 준비를 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때 준비사업의 하나로 살포한 선전삐라가 지금도 파언현당안관에 보존되여 있다. 그 삐라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천백만의 생명을 잔혹하게 학살하며 전쟁을 일삼는 흉악한 마귀 일본제국주의는 지금 붕괴되여가고 있다. 때는 왔다. 그 독사의 유린을 당하고 있는 민족들은 다 같이 궐기하라! 광명은 우리의 앞길을 비춰주고 있다!
피압박민족은 단결하자!
제국주의를 타도하자!
중국은 중화민족의 중국이다!
조선민족해방 만세!
조선반일독립동맹 12지부
이 삐라는 중조 인민들을 최후 결전에로 부르는 격문으로 되였고 적들에게는 숨통을 찌르는 비수로 되였다. 삐라를 발견한 적들은 그 출처를 알아내려고 미친듯이 날뛰였지만 결국 알아내지 못하였다.
이와 같이 김택명은 일제 경찰, 헌병, 특무들이 욱실거리는 할빈에서 반일지하활동을 끝까지 견지하였다.
김택명은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은후 ‘조선독립동맹 북만특별위원회’를 공개하고 할빈지구를 중심으로 하여 각 현에 조선독립동맹조직을 내와 조선사람들을 묶어세워 자기들의 생명재산을 보호하게 하였다. 김택명은 소련에서 할빈에 온 리조린장군과 련계하여 그해 9월 25일에 ‘할빈보안총대 조선독립대대’를 창건하고 대대장으로 되였다. 병력은 6개 중대였다. 이 기초에서 연안에서 나온 조선의용군과 합세하여 1945년 11월 25일 조선의용군 제3지대가 성립되엿고 주덕해가 정치위원으로 김택명이 지대장으로 임명되였다.
김택명은 혁명사업의 수요에 따라 1946년 6월 조선으로 갔다. 조선에 가서는 리상조란 본명을 썼다. 그는 전후로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간부부 부장, 상업성 부상, 조선인민군 부총참모장, 정찰국 국장을 력임하였다. 판문점에서 열린 조선전쟁 정전담판시 조선인민군 수석대표로 미군과 담판하였다. 정전후 소련대사로 있다가 1957년에 소련에 망명하였다. 1989년 한국 고향을 방문하였고 1998년 벨라루씨 수도 민스크에서 별세하였다.(하)
/서명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