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족동포 정율성 작곡가에 자부심 커
정율성 기념관은 한중우호 증진에 유리
(흑룡강신문=하얼빈) = 전남 나주 출신으로 중국 3대 기행문의 하나인 표해록(漂海錄)의 저자 최부(崔溥)선생이 있다. 그는 부친상을 당하여 제주에서 육지로 오다 풍랑을 만나 14일간 표류하여 절강성 태주부 임해현에 도착하였다. 처음에 왜구로 생각하고 죽이려 했지만, 조선 사람이라 하여 살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융숭한 대접을 받고 명나라 황제로부터 상까지 받았다.
그는 항주에서부터 북경까지 경항대운하를 타고 온 최초의 한국사람이며, 요동을 거쳐 6개월만에 돌아온 것을 기록한 책이 표해록이며, 중국에서 효의 대표적인 인물로 알려져 있다. 전 요녕대학 풍옥충(馮玉忠) 총장의 말에 의하면 "한국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은 이순신 장군이며, 두 번째가 최부 선생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중국의 유명한 음악가로 알려진 선성해, 섭이, 정율성은 태어난 곳부터 중국의 중심지가 아닌 먼 곳에서 태어났다는 것이 특이하였다. 선성해는 그의 원적은 광동성 번우(番禺)이지만, 마카오의 가난한 배 수리공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중국 해방 역사를 담은 '황하대합창' 등 많은 곡을 남겼으나, 아깝게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40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하였다.
섭이는 중국의 소수민족이 많이 살고 있는 운남성 옥계(玉溪)시에서 태어났으나, 그가 살았던 곤명시에 기념관이 있다. 중국의 국가인 '의용군행진곡' 등 많은 곡을 남겼으나, 1935년 23세에 러시아로 유학을 가기 위해 일본에 들렸다가 등택(藤澤)시 곡소(鵠沼)해변에서 익사하였다.
정율성 선생은 한국 광주시 동구 불로동에서 태어났다.
1980년대 정율성 선생의 조카사위로부터 그에 대해 청소년기 광주에서 살았으며, 중국에서 활동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다른 사람들은 별로 관심을 갖지 않았지만, 나는 그의 말을 귀담아 들었다.
중국에 갔을 때, 인민해방군가를 들을 수가 있었다. 그때 "저 노래를 작곡한 분이 한국인이다"라고 말하자 깜짝 놀랐다. 그들은 정율성 선생이 중국인으로 알고 있었다. 그 뒤 심양 조선족제일중학교에서 민족축제가 열릴 때 행진곡이 울려 퍼지자 사회자가 "이 곡은 우리 민족의 영웅이신 정율성 선생이 작곡한 노래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우리 동포들이 정율성에 대해 많은 자부심을 갖고 있는 것이 확실했으며, 동포들은 한국사람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광주가 고향이라는 것은 잘 모르고 있었다.
2002년 월드컵축구대회를 앞두고 광주와 전남이 중국인 관광객 유치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해 의견이 있었다. 나는 그때 광주에는 '정율성 선생 기념사업'을 전남에는 '주자묘(朱子廟) 정화사업'을 건의하였다.
전남도는 화순군 능주면에 있는 주자묘의 정화사업을 하였으며, 광주시는 정율성국제음악제를 개최하였다. 기념사업을 하기 위해서 정확한 생가 터도 찾아냈다. 생가라는 것이 확실하게 발견되어 기념비를 세웠으며, 그 후 그의 아버지의 고향인 화순군 능주에서 초등학교 1학년을 다닌 기록도 발견되어, 능주에도 동상이 세워졌다.
작년에 강서성 남창과 광주에서 정율성음악제가 개최되었으며, 금년 9월에 북경, 섬서성의 연안과 10월에 광주에서 개최하게 된다.
며칠 전 하얼빈을 방문하게 되었는데, 안중근기념관과 조선족민족예술관 관장을 맡고 있는 강월화 관장으로부터 정율성 기념관을 곧 개관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가 하얼빈에서 살지는 않았지만 하얼빈 동포들의 노력에 의해 세운다는 것을 보면 동포들에게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린다. 동포들이 있기에 한중간 우호교류가 더욱 증진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한중간 친선을 도모할 수 있는 인물들로는 혜초스님, 김교각 스님, 무상선사, 최치원 선생, 장보고 장군, 대각국사 의천, 최부 선생, 김구 선생, 안중근 의사, 윤봉길의사, 정율성 선생 등이 많이 있다. 그리고 거의 모두 기념관이나 기념비가 있는데, 하얼빈에 정율성 기념관이 생긴다는 것은 정말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얼빈에 기념관이 만들어지게 된 것을 보면 한중우호를 위해 내년에 하얼빈에서 음악제가 열리는 것도 좋은 일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