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룡강신문=하얼빈)=김택명은 일제의 백색테로가 살판치는 동북지구에서 조선독립동맹 북만특별위원회를 조직하고 각지에 하부조직을 건립하여 반일투쟁을 총지도하였으며 해방후에는 조선의용군 제3지대 지대장으로서 할빈지구 조선족의 생존과 발전에 기여가 많은 혁명강이다. 김택명이 할빈을 떠난지 60년이 되여가지만 그의 혁명정신과 업적에 대한 찬양은 계속 전해지고 있다.
김택명(金泽明)의 본명은 리상조(李相朝)이다. 중국 관내에서 지하공작을 할 때는 가명으로 호일화, 리준이란 이름도 썼다. 그는 1915년생으로서 경상남도 동래출신이다. 그의 부친은 애국자로서 일제의 조선강점을 반대하여 가족을 거느리고 동북에 들어와 심양 교구 공태향에서 농사를 지으며 반일독립운에 종사하였다. 김택명은 심양 동광중학교를 졸업하고 북경, 상해 등지에서 혁명활동을 하다가 1935년 광주 중산대학에 들어가 공부를 하면서 ‘용진학회’라는 혁명조직에 참가하였다. 1937년에는 남경에 있는 ‘중앙군관학교’를 졸업하였다. 1938년 5월에는 연안 항일군정대학 제5기생으로 입학하여 학습하였고 1940년초에는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그는 1941년 1월 1일에 성립된 ‘화북조선청년련합회’와 그의 군사조직인 ‘조선의용대 화북지대’에 참가하였고 1942년 7월 14일에 건립된 ‘화북조선독립동맹’에 참가하여 호일화란 가명으로 반일혁명활동을 하였다.
조선독립동맹은 조선과 동북(당시는 일제통치하의 만주국이였음)에서의 조직을 확장하고 반일투쟁을 폭넓게 전개하기 위하여 적후에 공작원을 파견하였다. 중국공산당 당원이자 조선독립동맹 맹원 두가지 신분을 가지고 활동하던 김택명은 조직의 파견으로 1942년 9월 24일에 심양에 도착하였다. 김택명은 동북으로 올 때 5가지 임무를 받았다. 그 중요한 내용은 동북과 조선의 기성 반일단체와 화북의 독립동맹과의 련계를 건립하는 일, 조선의 유명한 진보적민주주의 자들과 접촉, 협의하여 혁명단체를 조직하고 통일전선을 건립하는 일, 조선의 공산주의자들과 련계하여 운동을 전개하는 일, 동북의 항일무장부대와 련계하고 동북지방 조선청년들을 이들 부대에 참가시켜 항일무장력량을 강화하는 일, 기성 조직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자력으로 조선민족반일통일전선을 결성하여 조선민족의 력량을 강화하라는것이였다.
동북에 들어온 김택명은 우선 발붙일 자리를 찾아야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실로 어려운 일이였다. 이 일로 로심초사하던 그의 아버지는 몇해전 ‘만선일보’지면에서 파언현에 사는 김한률(김석주)이 어려서 갈라진 동생 김한규를 찾고잇다는 광고를 읽어본 기억이 떠올랐다. 김택명의 부모는 약 20년전 길림성 화전에서 그때 어떤 피치 못한 사정으로 서로 갈라졌는데 그의 어머니는 한두살밖에 안되는 한규를 업고 어디론지 가버린후 종무소식이 되였다는것을 알고 잇었다. 이리하여 김택명은 김한규로 가장하여 ‘형’ 김한률을 찾아갈 계획을 세웠다.
1943년 3월 말, 김택명은 행방불명이던 김한규로 자처하고 파언현 서집진 동성농장에 사는 농민 김한률을 찾아가 김한규로 행세하면서 사업을 전개하였다.
김택명은 그동안 내내 ‘장사군’으로 떠다니다가 형을 찾아왔다고 하면서 형의 일을 도와 로동에 참가하였고 동네사람들에게 곤난이 생기면 자기 일처럼 도와나섰다. 그는 동성농장에 온지 얼마 안되여 동네 기본상황을 손금보듯 장악하였다. 그는 조경형이란 청년과 침식을 같이하면서 서로 허물없이 지내게 되였다. 김택명은 조경형에게 조선의용군과 조선독립동맹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었고 조경형에게 새로운 희망과 투지를 안겨주었으며 교육을 통해 그를 조선독립동맹의 첫번째 맹원으로 받아들였다. 또 엄격한 고찰과 개별적인 교육을 거쳐 원용주, 김용덕, 한탁주 등 10여명을 맹원으로 받아들였고 1943년 5월 5일에 조선독립동맹 제12지부를 결성하였다.
김택명은 늘 ‘장사군’으로 가장하여 할빈을 중심으로 여러 곳을 다니며 활동을 전개하였는데 1943년 10월 6일에는 할빈 동과수 농촌에 있던 반일활동가 정경호(즉 정국광, 정성언이다), 수화현 장유툰에 있는 현용조(김용진), 할빈에 있는 현정민들과 할빈에서 회의를 열고 ‘조선독립동맹 북만특별공작위원회’(북만특위)를 건립하였다. 회의후, 정경호는 할빈시 삼과수, 호란 등지를 책임지고 조직을 발전시켰으며 김용진은 수화, 상지, 연수현을 다니며 맹원을 흡수하여 독립동맹지부를 건립하였고 현정민은 류수현, 서란 등 라빈선일대를 책임지고 류수현 청산포지부를 내왔다. 김택명은 북만특위의 사업정황을 북경시 서직문외 교장호동 12호에 있던 중공북경지하련락소를 통해 조선독립동맹총부에 5차례 보고하였다. 1945년 5월 9일, 조선의용군 총사령이자 조선독립동맹의 지도자였던 무정(武亭)장군이 주덕총사령과 중공중앙 해외사업위원회에 보낸 ‘화북조선독립동맹 1944년 1월부터 1945년 5월까지의 사업경과보고서’에는 ‘작년 12월 27일 비밀적으로 전해온 보고에 의하면 우리 조직은 할빈부근에서 비교적 큰 발전을 가져왔다… 그리고 금년 4월 23일의 보고에 의하면 적이 할빈에 꾸린 청년훈련소 약 2000여명의 조선청년들이 잇는데 거기에 이미 우리 동맹의 지하소조가 건립되였다.’고 보고하였다.
/서명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