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계서 우이.황칭이 막강파워..셰치화.양란 경제계서 두각
결혼이 족쇄가 되지않는 사회서 강국으로 이끄는 버팀목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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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대표적인 '철의 여인들'. 좌로부터 우의 부총리, 황칭이 부주석, 셰치화 전 회장. |
(흑룡강신문=하얼빈) "여인들이 하늘의 반을 떠받치고 있다(婦女頂半邊天)"는 중국에는 유독 '철의 여인(鐵娘子)'이 많다. 공정, 청렴, 실력으로 무장한 철의 여인은 중국이 세계 강국으로 가는 길목의 버팀목이 되고 있다.
포브스가 최근 발표한 '2007 세계 파워 여성 100인'에 중국은 우이(吳儀) 부총리, 우샤오링(吳曉靈) 런민(人民)은행 부총재를 포함해 모두 7명의 이름을 올렸다.
대표적인 철의 여인은 우이 부총리다. 우이는 1990년대 미국의 슈퍼 여성인 칼라 힐스 미 무역대표부(USTR) 대표와의 협상에서 밀리지 않는 저력을 보여준 뒤 철의 여인으로 등극했다. 칼라 힐스가 중국의 불법 복제를 문제삼아 “좀도둑과 담판하러 왔다”고 하자 우이는 “우리는 강도와 담판을 하고 있다. 미국 박물관의 전시품을 보라. 대부분이 중국에서 강탈해 간 것”이라고 응수했다.
신사참배에 반발해 고이즈미 일본 총리와의 회담을 일방적으로 취소할 수 있는 담력, 사스(SARS.) 위기를 처리하는 위기관리 능력, 중국산 제품 리콜 사태 및 위안화 절상 압력 협상에서의 강인함 등을 통해 우이로 대표되는 중국 여성의 힘을 엿볼 수 있다.
중국의 정계는 제2의 우이를 꿈꾸는 여성 인재로 넘쳐나고 있다. 중국부녀연합회 황칭이(黃晴宜) 부주석은 중국 여성 관리의 수가 전체의 40%에 달했으며 정.관계 최고위직에는 9명이 포진해 있다고 설명했다. 지난해 10월 열린 중국 공산당 제17차 전국대표대회에서도 445명의 여성 대표가 참가해 전체 대표의 약 20%를 여성 인재가 채웠다. 전문가들은 중국은 머지않아 여성 공직자 절반의 시대를 맞게 될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다.
경제계에서도 섬세하고 냉정한 판단력, 진취적인 경영방식을 가진 여성 CEO의 파워는 거세지고 있다. “철강과 결혼했다”는 평가를 들었던 셰치화(謝企華) 전 상하이바오산(上海寶山)강철 회장도 별명이 '철의 여인'이다. 청화대 토목공학과를 졸업한 그는 바오강의 창립멤버로 입사해 회장의 자리에 올랐다. 그녀는 세계 우수 철강재가 중국 시장으로 밀려들어 올 때 중국 정부에 세이프가드를 요청해 자국 철강산업을 보호했다. 이후 바오강을 미 포천 지 선정 세계 500대 기업, 세계 4대 철강회사로 발전시켰다. 셰 전 회장은 2005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기업인 50인' 중 2위에 오르기도 했다.
현재 중국의 여성 인재풀은 서구 선진국 못지않다. 중국뿐만 아니라 세계무대에서 활약하는 여성 인재가 늘고 있다. 홍콩의 천핑푸전(陳馮富珍)은 2006년 11월 세계보건기구(WHO) 사무총장으로 당선됐으며, 중국의 여성 변호사인 장웨자오(張月嬌)는 2007년 11월 세계무역기구(WTO) 분쟁 대법관으로 임명됐다.
▶결혼이 여성에게 족쇄가 되지 않는 중국사회
춘제를 열흘쯤 앞두고 상하이 구베이(古北) 까르푸 매장에는 장을 보는 젊은 부부가 눈에 많이 띄었다. 검은색의 세련된 정장에 드라이가 잘 된 단발머리의 젊은 여성이 하이힐을 또각거리며 걸어가고 뒤를 쫓는 남편은 저녁 찬거리를 챙기느라 여념이 없었다.
중국 여성에겐 '슈퍼우먼 증후군'이 없다. 오히려 중국 남성이 '슈퍼맨 증후군'에 시달린다. 직장생활도 해야 하고, 시장 보고, 저녁도 지어야 한다. 자녀 챙기는 것도 남자의 몫이다. 우이, 셰치화 모두 미혼 여성으로 중국 핵심 여성 인재로 성공했지만 중국에서는 '집안일, 남편, 아이' 때문에 여성이 성공하지 못했다는 핑계는 거의 들을 수 없다. 여성이 출근하지 않고 집에 있으면 그것이 더 이상한 사회가 중국이다.
"여자 영웅이 될 수 없다고 말하지 말라. 용천(옛 보검)의 날이 운다"며 민주혁명과 여성해방을 부르짖은 최초의 중국 여성 운동가 추진(秋瑾). 1875년에 태어난 그는 끊임없이 “여자는 학문을 익혀 자립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매사 남자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 오늘날 부르짖는 혁명은 자신의 가정에서부터 시작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2명의 아이를 맡기고 일본으로 유학을 간 그는 '삼가 중국의 2억 여성 동포에게 고함' 등의 논문을 통해 전족의 폐해와 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추진의 여성해방 운동에 이어 중국 공산당도 1949년 신(新)중국을 건설하며 '사회주의 건설에는 남녀 구분이 없다'며 여성도 남성과 똑같이 사회생활을 하게 했으며 여성의 지위 향상을 강조했다.
남녀평등 의식으로 무장한 남편의 외조는 중국 여성이 성장하는 데 큰 뒷받침이 됐다. 중국 여성의 선망의 대상이자 중국의 오프라 윈프리로 불리는 양란(楊瀾) 양광(陽光)미디어투자그룹 창시자는 "남편의 외조 덕분에 오늘의 성공이 가능했다"고 말했다. 미국 유학 중 만난 남편은 그녀가 방송활동을 위해 다시 귀국하고 싶다고 했을 때 미국 사업을 접고 돌아와 주었으며 올림픽 홍보대사 일을 맡은 후에는 상하이에서 베이징으로 함께 옮겨왔다.
그는 중국 최초의 심층 대담 프로그램인 '양란 탐방록'을 진행하며 탁신 태국 수상, 헨리 키신저 전 미 국무장관 등 전세계 유명 인사 450여 명과 대담했다. 아시아위크 선정 '21세기 중국을 움직이는 사람'(2001)으로 선정됐으며, 2001년 올해의 중국 여성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제2차 중국 여성의 사회적 지위' 조사에 따르면 남편이 실권을 쥐고 있는 가정은 39%, 남편과 아내가 동등하게 실권을 쥐고 있는 가정은 39%, 아내가 실권을 장악하고 있는 가정은 22%였다. 즉, 중국 가정의 약 60%에서 여성이 남성과 동등하거나 더 센 목소리를 내고 있다.
또 중국 대학에 재학 중인 여학생 수만 해도 600백만 명을 넘어서 전체 대학생의 45% 이상을 차지한다. 인문학과 사회학이 강점인 상하이 푸단(復旦)대 등은 여학생 비율이 남학생 비율을 이미 넘어섰다.
/김선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