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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형식 할빈에서의 혁명활동
http://hljxinwen.dbw.cn   2009-07-02 15:08:01
 
 
 
 
 

  (흑룡강신문=하얼빈)= 동북항일련군 제3군 군장, 동북항일련군 제3로군 총참모장이였던 허형식은 항일영웅으로 동북 각 민족인민들속에 널리 알려져 있다. 그의 공훈은 많은 서적과 신문에 보도되고 있다. 여기에서는 주로 허형식렬사가 혁명에 참가한 초기 할빈에서의 혁명활동을 소개한다.

  허형식(许亨植)의 원명은 허극(许克)이다. 혁명에 참가한후 리희산, 리삼룡이라도고 불렀다. 할빈에서 혁명활동을 할 때는 허극이란 본명을 썼다.

  허형식은 1909년 조선 경상북도 선산군 구미면 임은동에서 태여났다. 그의 아버지 허창일은 조선의 의병운동에 적극 참가해 싸우다가 일본제국주의의 피비린 진압을 피해 1917년에 가족을 거느리고 흑룡강성 주하현으로 망명해왔다. 그후 살길을 찾아 료녕성 개원현 리가대자로 이주했다가 다시 흑룡강성 빈현 가판참으로 이주했다. 1929년에는 할빈 황산저자(黄山咀子)에 이주해 농사를 지었다.

  황산저자에 이주해왔을때 허형식은 20세의 청년이였다. 이곳 농장은 할빈시의 자본가와 관리들이 결탁해 개설한 '혜제도전회사'인데 수전을 풀고 전문 조선족농민들을 받아들여 참혹한 착취를 했다. 일제의 압박과 지주들의 착취에 계급각오가 높아진 허형식은 중국공산당에 가입해 지하당원으로서 반일, 반봉건 투쟁에 선봉으로 나섰다.

  1930년 초봄 황산저자 조선인농민들은 중공 북만특위의 령도밑에서 '황산저자농민조합쟁의단'을 조직해 혜제도전회사와 감조감식투쟁을 벌였다. 5월 1일 오전 허형식을 위수로 한 쟁의단의 인솔하에 70여명 농민들이 할빈시내에 와서 혜제도전회사를 포위하고 감조감식을 요구했으며 전 만주조선인농민들에게 보내는 '선언서'를 발표했다. 이 사건은 당시 큰 사건으로 '할빈시지'에까지 오르고 있다.

  1930년초 중공 북만특위는 국제 '5.1'로동절을 계기로 할빈에서 '5.1'시위행진을 해 할빈주재 일본총령사관을 습격할 계획을 세웠다. 북만특위 위원인 리극화는 조선인청년들도 '5.1'시위에 참가하도록 포치했다. 이 결정을 실행하기 위한 준비사업을 위해 1930년 4월 28일 황산저자에 있는 허형식의 집에서 회의를 열었다. 회의에는 리극화의 지시를 받고 해구의 한형도(원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선전부장 장시우), 취원창의 박원혁(원명 박만수, 중국공산당 취원창의 지하당 책임자), 황산저자의 허형식(중국공산당 황산저자 지하당 책임자)이 참가했다. 이 회의에서 '5.1'절날 할빈에 가 일본총령사관을 습격할 행동계획을 토론했다. 결과 한형도는 해구의 청년들을 동원, 조직하고 박원혁은 취원창의 청년들을 동원, 조직하며 허형식은 황산저자의 청년들을 동원, 조직하기로 결정했다.

  4월 30일 허형식은 황산저자 10여명 청년단원을 거느리고 할빈시내에 가서 지정된 집결장소인 할빈시 도외구 태고14도가에 있는 조선인 정주해(독립운동가로서 한국정부의 애국장을 수여받음)가 꾸리는 려관에 갔다. 5월 1일에는 해구, 취원창, 사리툰 옥천 그리고 할빈에서 공부하고 있는 조선인청년들 35명이 모여 행동계획을 짰으며 분공을 했다. 거기에는 프랑카드를 드는 사람, 구호를 부르는 사람도 있고 허형식은 선전삐라를 뿌리는 책임을 졌다. 회의후 모두 산산이 흩어져 남강 추림상점부근에 모였다.

  오후 6시 30분 조선청년들의 반일대오는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자!'라는 기발을 들고 '돌격!', '부셔라!'소리와 함께 폭풍우가 쏟아지듯 돌멩이로 일본총령사관을 습격했다. 허형식은 용감히 앞장에서 싸웠다. 이 돌연적인 사건에 길가던 군중들이 수백명이나 모여들었다. 이 틈을 타서 허형식은 가지고 있던 선전삐라를 다 뿌렸다. 시위대오는 인차 중국경찰에 포위되여 청년들은 적수공권으로 경찰들과 박투를 했으나 허형식을 비롯한 32명의 청년들이 체포되고 말았다.

  체포된 허형식은 감방에서도 견결히 투쟁했다. 동지들과 같이 세차례의 단식투쟁을 견지했고 대다수 동지들이 석방되게 하기 위해 허형식과 다른 7명이 주동적으로 이번 사건의 조직과 령도책임을 져 허형식, 서경락, 리욱 세사람은 8개월 징역을 판결받고 허형식은 심양감옥에 이송되여 1년 남짓한 감옥생활을 하다가 '9.18'사변후 석방되였다.

  허형식은 빈현에 있을때 김정숙과 결혼하고 딸까지 하나 있었으나 그는 가정생활과 개인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처와 딸애는 태평교(太平桥)에 있는 처가집에 보내고 혁명의 길을 떠났다. 원 흑룡강성교육학원에서 사업하던 허형식의 처남 김광희선생은 그때의 일을 회억하면서 '누이 김정숙은 빈현에 있을때 허형식과 결혼했다. 그때 빈현일대의 토비들이 조선사람을 못살게 굴어 하는수없이 우리 두 집은 할빈으로 이사해왔다. 그런데 자형(허형식)은 혁명활동으로 늘 나다니고 누이(김정숙)는 딸애를 데리고 우리집에 와 있었다. 허형식이 혹시 몇달만에 집에 와서 하루밤 자고 가면 경찰들이 우리집에 와 허형식을 내놓으라고 우격다짐했다"고 말했다.

  허형식은 김책동지와 함께 빈현에 가 당의 지하사업을 하다가 항일유격대에 전근되여 선후로 대대장, 단장, 사장, 군장, 제3로군 총참모장, 중공 북만성위 위원 등 사업을 하면서 수많은 전투에 참가했고 우수한 정치사업일군으로, 뛰여난 군사지휘원으로 성장했다. 그는 민족의 해방사업을 위해 일생을 싸우다가 1942년 8월 3일 일제토벌대와의 치렬한 격전에서 장렬하게 희생되였다. 그때 그는 겨우 33세였다.

  허형식장군의 공훈을 길이길이 기념하기 위해 지금 경안현 대라진 청송령 들머리에 허형식희생지 기념비가 세워져있다.

  /서명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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