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사회
 
독립군의 녀걸 남자현
http://hljxinwen.dbw.cn   2009-05-14 19:12:06
 
 
 
 
 

  (흑룡강신문=하얼빈)= 우리 조선민족은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기 위하여 조선의 독립을 위하여 싸웠고 그중에는 수많은 녀렬사들도 있다. 독립운동가로서 한국정부의 건국훈장과 대통령장을 받은 사람들가운데 녀자로서는 남자현(南慈贤)밖에 없다. 남자현은 할빈에서 반일독립운동을 하였고 할빈에서 일제의 감옥생활을 하다가 순국하여 할빈조선인묘지에 안장되였으니 그는 영광스러운 력사의 한페지를 할빈에 남겨놓았다.

  녀성독립운동가 남자현은 경상북도 영양군 석포면출신이다. 19살에 결혼했는데 6년후 남편 김영주가 의병으로 나가 싸우다가 희생되였다. 남자현은 삼대 독자인 유복자를 정성껏 기르고 시부모를 봉양하여 효부로 이름이 높았다.

  1919년, 남자현은 ‘3.1’운동에 참가한후 동년3월 9일 중국 동북으로 망명하여 독립군 서로군정서(独立军西路军政署)에 참가하여 활약한 서로군정서의 유일한 녀대원이였다. 그는 각 독립운동단체와 군사기관, 농촌을 다니면서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동시에 동만일대 10여처에 녀자교육회(女子教育会)를 조직하여 녀성계몽과 해방운동에 성심을 다 하였다.

  1920년 10월, 남자현은 유명한 청산리전투에 참가하였다. 조선독립군은 일본군 가노오련대장이하 관병 1000여명을 사상하고 수백자루의 무기를 로획하였다. 대승리를 하고 철퇴한후 남자현은 부대에서 떨어져 부상병들을 돌보는 일을 하였는데 독립군의 자애로운 어머니 역할을 했다 하여 사람들은 남자현을 ‘독립군의 어머니’라고 불렀다.

  1925년에는 리청산, 채찬 등 동지들과 함께 조선의 일본총독 사이또(齐藤)를 처단하기로 결의하고 서울에 들어갔다가 계획이 실패되여 중국 동북으로 돌아왔다. 1928년에는 길림에서 김동삼, 안창호를 위수로한 47명의 독립운동가들이 중국 경찰에게 잡히게 되자 남자현은 감옥까지 따라가서 지성으로 옥바라지를 하였으며 그들의 석방을 위해 동분서주하면서 백방으로 노력하였다.

  남자현은 1929년 북만으로 이동하여 독립운동가 김동삼이 독립운동의 기지로 개척한 아성현 취원창을 거점으로 할빈에서 반일활동을 전개하였다. 1931년 10월 민주독립운동의 거두로 불리우는 김동삼이 할빈에서 일경에게 체포되여 남강 의주가에 있는 일본총령사관 지하실감방에 투옥되였다. 남자현은 김동삼의 친척으로 가장하고 일본총령사관에 자주 드나들면서 감옥에 갇힌 여러 동지들에게 중요한 련락을 취해주었다. 그는 김동삼과 같이 체포된 리원일을 조선 신의주감옥으로 호송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호송될 때 탈환할 계획을 세웠으나 시일이 촉박하여 성사하지 못하였다.

  1932년 5월 9일, 국제련맹리사회에서 소위 ‘만주국문제’를 조사하기 위하여 영국인 ‘리톤’을 위수로 한 ‘국제련맹조사단’(일명 리톤조사단이라고도 함)이 할빈에 도착했다. 이 조사단은 도리 중앙대가에 있는 마디얼호텔에 들었다. 일제놈들은 세계 여론을 기편하기 위하여 집집마다 바깥에는 만주국 국기를 걸고 집안에는 황제 부의의 사진을 걸게끔 강요하여 할빈시민들이 만주국을 옹호한다는 분위기를 조성하느라 애썼다. 만주국과 일제 침략을 반대하는 ‘혐의분자’를 체포하여 송화강건너 송포집중영에 가두었다. 조사단이 할빈에 머무른 14일간 중국인 5명, 러시아인 2명, 조선인 1명(성명은 김곡)이 조사단에 편지를 넘기려다가 일경에게 체포되여 총살당하였다. 이렇게 삼엄한 경계속에서도 남자현은 왼손 무명지를 두마디 잘라 ‘한국 독립 원(韩国独立愿)이란 다섯 글자의 혈서를 써서 흰 수건에 싸가지고 조사단에 보내는데 성공하였다. 이로 하여 조선인의 독립정신을 국제련맹에 호소할수 있었고 불타는 그의 애국심을 보여주었다.

  1933년 봄, 남자현은 오는 3월 1일에 위만주국 수도 신경(지금의 장춘)에서 만주국 건국 1주년 기념대회를 성대히 치른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동지들과 함께 이 기회에 만주국 일본전권대사 다께 후지신기(武藤信义)를 격살할것을 계획하였다. 남자현은 이 계획의 실현을 위하여 동지들과 련락을 맺고 2월 27일 할빈에서 중국할머니로 변장하고 권총과 폭탄을 운반하다가 당시 할빈시 도외 정양가에서 일본경찰에게 체포되였다.

  62세 환갑이 지난 남자현은 할빈주재 일본총령사관 지하실 감방에 구금되여 여섯달동안 계속되는 혹형을 받았다. 그해 8월 6일부터 일제의 폭행에 항거하는 단식항쟁을 시작하였다. 그후 15일만에 혹형과 단식으로 체력이 쇠약할대로 쇠약해진 남자현은 사경에 이르러 보석석방되였으나 ‘독립은 정신으로 이루어지느니라!’라는 말을 남기고 1933년 8월 22일에 순국하였다. 그의 시체는 할빈 남강 러시아공동묘지(지금의 문화공원) 서쪽에 있는 조선인묘지에 안장되였다.

  1988년 여름, 남자현의 손자 김시련은 자기 아버지 김성남이 취원창의 동지들과 남자현의 묘지앞에서 찍은 기념사진 한장을 들고 묘지를 찾아보려고 한국에서 할빈까지 찾아왔다. 유감스럽게도 1958년 할빈시도시건설의 ‘대약진’년대에 시내에 있던 중국인과 외국인 묘지가 전부 황산묘지로 옮겼고 원래의 조선인묘지가 없어지는바람에 남자현의 묘도 ‘주인 없는 묘’라 하여 평지로 만들어 없어지고 말았다. 조선인묘지에서 청명이나 추석이면 벌초도 하고 제사를 지내던 9명의 할머니들과 좌담하는 석상에서 김시련은 “할머니의 묘지는 찾을수 없으나 할머니가 싸우다 세상뜬 할빈을 보고 가는것만 해도 만족합니다.”라고 하였다.

  /서명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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