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사회
 
할빈‘대한국민회 만주리아총회’의 설립
http://hljxinwen.dbw.cn   2009-05-08 08:44:02
 
 
 
 
 

  (흑룡강신문=하얼빈)= 1910년 4월 할빈에는 반일단체 ‘대한국민회 만주리아총회’가 성립되여 반일의 기치를 더 선명하게 높이 쳐들었고 동청철도연선에 사는 조선인속에서 더 광범한 반일활동을 전개하였다.

  당시 할빈의 반일활동은 한국 국내와 미국, 러시아 등 나라의 반일활동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일본은 ‘을사조약’ 체결로 한국의 외교권을 탈취하였으며 날로 치렬해가는 항일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집회와 결사를 금지할 목적으로 ‘보안법’을 제정하였다. 이 법에 의하면 ‘대한자강회’, ‘동우회’ 등 단체를 강제적으로 해산시켰다. 일본은 이 법을 리용하여 반일 시위와 의병운동을 탄압하였다. 일제의 핍박에 견딜수 없어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해외에 나가 반일단체를 조직하여 반일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때 한국 국내에서는 친일이냐 반일이냐 하는 파벌이 서로 대립하고 있었다. 친일파 ‘대한협회’, ‘일진회’는 ‘한국정부를 페지하고 일본이 직접 통치할것’을 요구하는 한일합방진정서를 황제와 일본통감께 제출하였다. 이와 반대로 반일단체인 ‘신민회’ 계렬의 안창호, 리시영, 리동녕, 김구 등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은 해외로 망명하였다.

  그 시기 할빈의 조선인사회에서도 친일이냐 반일이냐 하는 사조가 대립되여 있었다. 할빈주재 일본총령사관은 1907년 2월 5일에 건립되여 할빈에 거주하고 있는 조선인들을 통제하기 위하여 조선인을 보호한다는 명의하에 1907년 8월에 할빈 ‘한인회’란 조직을 내왔다. 이 한인회는 일본총령사관의 허가를 받고 조직되였는데 그 감독하에 활동하고 있는 친일분자를 암암리에 양성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 한인회는 그 본색이 드러나 반일파 김성백, 김형재, 탁공규가 주도한 여론에 의해 끝내 해산되였고 반일파 김성백을 위수로 한 새로운 ‘한민회’가 나왔다. 이 한민회는 일본총령사관과 거래도 하지 않았고 총령사관의 감독도 받지 않았다. 안중근의사가 조선침략의 원흉 이또 히로부미를 처단하여 민족의 원쑤를 갚았다고 찬양받고 반일활동이 고무를 받고 있을 때 그와 반대로 일본총령사관과 일본인 거류민회에 쫓아가서 ‘애석하다’고 조문하는 사람도 몇이 있었다. 일본의 외교문건에는 ‘할빈에 남겨둔 총령사관의 정탐을 도와주고 있는 한인 모모는 11월 30일 할빈의 한인들 약 70여명이 부두구 한인학교에 모여서 정재관 (미국 신한민보의 발행인)이 할빈에 올 때 어떻게 환영을 할것인가를 합의하였다.’라는 정보를 받았다고 씌여있으니 조선인들속에 일본총령사관의 밀정도 있었음을 증명한다.

  미국에 망명한 유명한 독립운동가 안창호와 리승만의 노력으로 1910년 2월 1일 샌프랜시스코에서 ‘대한국민회’가 성립되였다. 기실 샌프랜시스코에 성립되였던 ‘공립협회’는 ‘대한국민회’로 개칭하고 그 기관지였던 ‘대한신보’는 ‘신한민보’로 개칭하여 언론을 통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이에 따라 러시아 울라지보스또크 ‘공립회’도 ‘대한국민회 지방총회’로 개칭하였다.

  할빈에서는 1910년 4월 할빈 ‘공립회’를 ‘대한국민회 만주리아총회’로 고치고 중앙총회의 직속 지회로 만들었다. 회장에 김성백이 추천되였다. 이 조직은 계속 확대되여 만주리아총회밑에 할빈지방회, 석두하자자지방회, 횡도하자지방회, 목릉지방회, 하이랄지방회, 삼성(지금의 의란)지방회 등 주로 동청철도연선의 조선인 집거지구에 지방회를 건립하였다. 당시 이런 지방의 조선인 인구정황을 보면 할빈시에 268명, 석두하자에 208명, 횡도하자에 155명, 목릉에(대마구까지 합해서) 39명, 수분하에 33명 있었다. 지방회 조직이 나오면서 조직적인 반일활동이 더 광범히 전개되였다.

  1910년 8월 29일, 일본제국주의는 ‘한일합병조약’을 체결하고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었다. 일제는 한국의 땅은 합병하였으나 한국인의 민족혼은 합병할수가 없었다. 1910년 9월 1일, 할빈에서 출판하는 중국신문 ‘원동보’는 ‘할빈의 한국인들은 나라 잃은 격분을 참지 못해 한일합병을 반대하는 항의서를 일본정부에 제기했다’고 보도했으며 ‘한국인들은 자주 학교에 모여 한일합병에 대처할 방도를 의논하군 하였다. 그때 적지 않은 할빈의 한국인들은 일본령사관의 관제를 받지 않고 러시아국적에 드는 행동으로 한일합병에 반대하였다.’라는 소식이 실렸다. 이러한 반일활동은 모두 ‘대한국민회 만주리아총회’와 할빈 ‘한민회’의 지도, 조직밑에서 이루어진것이다.

  할빈 ‘대한국민회 만주리아총회’는 할빈과 중동철도연선에 거주하고 있는 조선인들을 단합하기에 힘썼으며 조선인들에 대한 민족의식, 반일사상 교육에 힘썼다. 그후부터 할빈은 조선독립운동가들이 항일활동을 벌려온 근거지의 하나로 되였다.

  /서명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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