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룡강신문=하얼빈 2008-05-19) = 막대한 재산, 인명피해를 가져다준 ‘5.12’대지진 발생당시 최대피해지의 한곳인 사천성 면양시에서 대학교를 다니던 한 조선족녀대생이 직접 겪은 대지진 발생당시 상황과 충격을 본지에 고백했다.
그날 평일과 같이 유쾌한 오전수업을 마친 나는 오후수업이 없다보니 침실에서 텔레비전을 보면서 휴식을 취했다. 그러던중 갑자기 침실이 좌우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순간적으로 자신이 착시현상이 생겼는가고 의심했지만 지속적인 격렬한 진동에 침실친구들은 지진이라고 고함치며 밖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지진을 처음 겪는 나는 잠옷바람 그대로 허둥거리며 침실친구들 따라 문밖으로 나갔다. 6층에 있는 침실을 나오니 많은 학생들이 허겁지겁 아래층 탈출구로 달리고 있었다.
격렬한 진동에 몸을 비틀거리며 아래층으로 내달리던 나는 이렇게 죽는것이 아닌가는 심한 공포로 심장이 마구 터질것만 같았다. 지진발생당시 샤와를 하다가 알몸으로 뛰쳐나온 학생, 극심한 두려움으로 침대를 내려오지 못하다 친구의 손에 끌려나온 학생, 침대가 무너지면서 출입문이 막히자 발로 문을 박차고 나온 학생, 베란다로 달려가 이웃침실을 통해 탈출한 학생…아수라장이 된 현장을 가쁜 숨을 몰아쉬며 탈출한 많은 녀학생들은 힘이 빠진 다리를 가누지 못하고 땅바닥에 물러앉았고 너무나 갑작스러운 상황에 울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좀 안정을 찾은 학생들은 친구나 친척들에게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허나 통신이 이미 중단되였다.
전기가 끊기고 많은 건물이 파손되였다. 특히 학교 표징성건물인 신축도선관과 종합청사의 파손도가 가장 심했다. 유리창문이 파렬되고 천장판이 떨어지고 바닥에 큰 균렬이 생겼다. 학교는 학생들을 건물을 멀리한 넓은 평지로 이전시키는 긴급대책을 취했다. 우리는 모두 학교 중심호 주변에 집중되였지만 여진은 여전히 계속되였다. 12일 저녁 우리는 물건들을 모두 한곳에 집중시켜 놓고 과자와 물을 사다가 간단히 배를 채웠다. 잠옷바람으로 기숙사를 뛰쳐나온 나는 추위를 견딜수 없었다. 마침 학교롱구장에 두터운 옷이 비치되여 있다는 소식에 나는 그쪽으로 갔다. 롱구장에는 많은 학생들이 모여있었다.
일부는 롱구를 치고 일부는 컴퓨터로 지진속보를 보고 있었고 일부는 기타를 켜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런 광경에 나를 비롯한 친구들은 비로서 마음의 평정을 되찾게 되였다. 야밤이 되여 기온이 내려가자 모닥불을 지펴놓았지만 추위는 여전하였다. 지도원선생님의 인솔로 1층에 침실이 있는 몇몇 학생들은 기숙소로 돌아가 이불을 가져왔다. 허나 물품도난 등 상황을 우려하여 이불을 제외한 기타 물품휴대는 일률로 금지되였다.
심야 주위는 정적이 깃돌았지만 여진으로 여전히 진동을 느꼈다. 일부는 이불을 깔고 자고 일부는 차거운 세멘트바닥에 누워자고 일부는 세멘트탁구판우에서 잤다. 밤이 깊어지고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옷견지와 이불로 천막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때 무슨 물건이든 우리에게 보배처럼 느껴졌다. 우리는 공포속에서 이튿날을 맞이하였다.
이튿날 학교에서는 매개 학부에 천막을 제공하였다. 우리는 벽돌을 주어와서 천막을 고정시키고 천막우에 이불을 덮어놓으면서 림시거주지를 만들었다. 이런 천막이 있었기에 더 이상 비를 맞지 않고 천막안에서 무사히 사흘밤을 지낼수 있었다.
그후 며칠간 돈도 떨어지고 은행 자동인출기도 실효된 상황에서 지속되는 여진, 비, 추위, 기아로 우리는 전전긍긍하면서 매하루를 보냈다. 식당일군들은 페쇄된 식당입구에 큰 가마를 걸고 국수와 닭알을 삼아주었다. 학생들은 줄을 지어 배식을 기다렸다. 정말 텔레비전에서나 보아왔던 난민영의 생생한 모습이였다.
전면휴학에 들어간 우리는 매일 라디오, 컴퓨터를 통해 지진 관련 소식을 접하였다. 우리와 가까운 곳인 북천에서 큰 인명피해가 생기고 많은 사람이 땅속에 파묻혀 있다는 사실에 친구들은 더욱 큰 공포와 절망속에 빠졌다.
이번 재난중 한 학급친구가 우리 곁을 떠났다. 지진발생당시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던 그 녀자애는 유리쪼각에 머리를 다쳐 구급무효로 사망했다. 15일, 아직 학교에 남은 몇몇 급우들과 학교령도들 그리고 그의 부모가 참가한가운데 간단한 영결식을 치렀다. 22세의 꽃나이에 우리곁을 떠난 그 친구는 요즘 다이어트를 한다며 매일 줄뛰기를 하고 건강체조를 하던 활발하고 락관적인 친구였다.
음식솜씨를 자랑하면서 집에서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오던 그의 음식솜씨를 다시는 맛볼수 없게 되였다. 화장터로 가는 길에 도처에 천막이 있었고 길가에는 구호차와 경찰차로 북적였다. 많은 사람들이 헌혈하고 있었고 곳곳에 설치된 기부함앞에 사람들의 행렬을 이어지고 있었다. 화장터에는 많은 시체가 화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몇분에 한구의 시체꼴로 화장터는 분주히 돌았고 지켜보는 친인척들은 극심한 비통으로 가슴을 쥐여뜯거나 수심에 잠겨있었다.
15일, 학교가 전면 휴학을 선포하자 나는 버스를 리용해 중경으로 이동하고 중경에서 다시 비행기를 타고 비교적 안전한 서안에 도착했다.
이번 재난을 통해 나는 인간세상의 따사로움과 단결의 힘, 그리고 살아있다는 자체의 행복을 처음으로 절실히 느꼈다.
/서남과학기술대학 김춘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