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룡강신문=하얼빈) = 1924년 4월 7일 저녁 11시, 할빈시, 도외 18도가에서 조선독립당 성원 3명과 일본 경관대와 중국경찰대로 이루어진 적군 200여명 사이에 격렬한 전투가 밤새껏 벌어져 세상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력사에서 이 전투를 ‘삼의사사건’이라고 한다.
삼의사란 조선의 독립운동가 김만수(金万秀), 류기동(柳基东), 최병호(崔炳镐) 세 사람을 말한다. 그중 김만수는 한국에서 출판된 ‘국사대사전’에도 이름과 사적이 오르고 있다.
김만수(1894. 11. 5-1924. 4. 7)는 경상북도 안동군 풍산면 출신이다. 1910년 일제가 한국을 강점하자 김지섭, 김재봉, 김인섭 등과 같이 항일투쟁을 결의하고 1913년에 중국 동북으로 망명하여 왔다. 그는 남만주에 있는 독립혁명단체인 서로군정서(西路军政署, 1919년에 조직됨. 독판에 리상룡, 군사참모장에 김동삼)에 참가하여 활동하였다. 1924년 4월에 항일단체인 참의부(参义府)의 일원으로 임무를 맡고 할빈에 체류하였다.
류기동(1892-1924)은 안동군 입동면출신이다. 1917년에 중국 동북으로 망명하여 왔다. 1922년 화전현에서 서로군정서 헌병으로 활동하였다. 1924년 1월초, 화전현에서 자기의 가정과 이웃 10여세대를 데리고 할빈에서 70리 떨어진 독립운동근거지로 개척한 취원창에 집단적으로 이주해왔다. 3월초, 취원창에서 교포들의 이주문제로 할빈에 출장나왔다가 서로군정서에서 같이 일하던 김만수를 만났다.
최병호는 강원도출신이다. 일찍 서로군정서의 헌병조직에서 김만수, 류기동과 같이 활동하던 동지이다.
세사람은 할빈시 도외구 18도가에 있는 중국인이 꾸리는 신기려관 2층에 투숙하고 있었다. 때마침 독립군과 애국지사를 전문 체포하는 일본인 특별형사 경찰부장 구니요시 세이호(国吉精保)를 위주로 하는 특별형사반이 대련에서 파견되여 와 며칠전 할빈에서 북로군정서(길림성에서 조직된 독립운동단체로 총재에 서일, 총사령관에 김좌진)의 독립투사 2명을 체포하였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김만수는 절회의 기회라 판단하고 류기동, 최병호와 같이 일본형사반을 습격하기로 합의하고 려관에서 거사계획을 토론하고 있을 때 이들의 비밀이 일본 형사경찰에 탄로되였다. 사람들이 모두 밤잠이 폭 들 때인 11시경에 일본 특별형사반 경찰, 할빈주재 일본총령사관 경찰과 중국경찰 200여명이 동원되여 신기려관을 첩첩히 포위하여 격전이 벌어졌다. 독립군의 세 용사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응전하였다. 적들은 조선인통역을 내세워 투항하라고 고함을 지르며 권고하였으나 용사들은 복수의 사격으로 적의 두목인 특별형사부장 구니요시 세이호를 쏘아죽였고 계속해서 일본형사 마쯔시마(松岛) 등 10여명을 사살했다. 세 용사는 완강하게 싸웠으나 적과의 력량대비가 너무도 현저했고 탄알까지 떨어진데다가 중국경찰이 던지 폭탄이 폭발하여 모두 전사하였다. 당년 김만수는 31세였다.
이 사건에 대하여 조선에서 발행되는 ‘조선일보’ 1924년 4월 16일 신문에 ‘독립당원 할빈에서 비장한 최후를 고함’이란 제목으로 사건의 경과를 보도하였다. 할빈에서 발행되는 중국신문 ‘빈강시보(滨江时报)에도 이 사건이 보도되여 중국인들도 삼의사의 애국심에 감탄하였다.
애국자 세 용사의 시체는 중국인 공동묘지에 가장(假葬)하였다가 11일날 ‘할빈조선인회’에서 주최하고 각계 유지인사들이 참가하여 남강 극락사 동쪽에 있는 조선인 공동묘지에 안장하였다. 한국정부에서는 세 용사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김만수에게는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하고 류기동, 최병호에게는 건국훈장을 추서하였다.
현재 한국 서울 강남구 역사동에 살고 있는 김만수의사의 손자 김홍재가 자기 할아버지의 무덤을 찾아보고 할아버지를 안장해준 할빈 조선인들에게 감사를 드리려는 마음에서 몇해전 할빈에 오려고 련락이 있었으나 할빈시 도시건설로 그 공동묘지가 황산조선인 공동묘지로 옮겨갔으므로 삼의사의 묘지를 찾을수 없었다.
/서명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