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지동맹을 결성
1909년 1월 안중근은 러시아 연해주 크라스키노(연추) 부근의 하리 부락에서 11명의 동지들을 초청하여 집회를 가졌다. 이 집회에 참가한 사람으로는 안중근(31세), 김기룡(30세), 강순기(40세), 정원주(30세), 박봉석(32세), 류치홍(40세), 조응순(25세), 황병길(25세), 백규삼(27세), 김백춘(25세), 김천화(26세), 강창두(27세) 모두 12명이었다.
안중근은 모인 사람들에게 "우리들이 전후에 전혀 아무 일도 이루지 못했으니 남의 비웃음을 면하기 어려울것이요. 뿐만 아니라 만일 특별한 단체가 없으면 어떤 일이고 간에 목적을 달성하기가 어려울것인즉 오늘 우리들은 손가락을 끊어 맹세를 같이 지어 증거를 보인 다음에 마음과 몸을 하나로 묶어 나라를 위해 몸을 바쳐 기어이 목적을 달성하도록 하는것이 어떻소?"하고 제안하였다.
집회에 참가한 사람들은 모두가 그대로 따르겠다고 하였다.
열두사람은 각각 왼쪽 약지를 끊어 그 선혈을 모아 태극기 앞면에 '대한독립' 넉자를 크게 쓰고 거기에 각자가 피로 서명한 다음 대한독립만세를 일제히 세번 부르고 국가를 위하여 몸 바칠것을 하늘과 땅에 맹세하였다.
이와 같이 '단지동맹' (단지혈맹이라고도 함)이 결성되고 안중근이 회장이 되여 동의단지회 추지문을 혈서 하였다.
여러 사람들은 각처로 가서 여러가지 형식으로 반일 독립활동을 전개하도록 하였다.
이때로부터 약지를 끊은 왼손은 안중근의 조국을 열애하는 일편단심을 상징하였고 각종 유묵을 쓴 다음에도 정중히 왼손을 찍어 도장으로 대처하였다.
안중근이 할빈에 도착
1909년 10월 중순 안중근이 블라디보스토크에 이르러 들으니 일본의 이토히로부미가 장차 이곳으로 올것이란 소문이 자자하였다. 안중근은 자세한 내막을 알고싶어 여러 신문을 사보았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출판하는 조선문 신문 '대동공보'와 할빈에서 출판하는 중군 '원동보'에서 두가지 소식을 보았다. 하나는 일본 추밀원 의장 이토히로부미가 러시아 대장대신을 만나려 15명의 수행원을 거느리고 시모노세끼에서 '데쯔레이 마루'호를 타고 일본을 떠나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할빈으로 간다는것이였다. 또 하나는 러시아의 대장대신 코코프체프가 원동을 시찰하기 위하여 장차 할빈으로 간다는 소식이다. 이 두소식을 종합하여 분석한즉 이토히로부미가 근일 사이에 할빈에 도착할것이라는것이 참말이요 의심할것이 없었다.안중근은 "여러해 소원하던 목적을 이제야 이루게 되다니! 늙은 도적이 내 손에서 끝나는구나!'생각되어 남몰래 기뻤다.
그러나 블라디보스토크에 온다는 말은 아직 자세치 않은 말이요, 할빈에 간 연후에라야 일을 성공할것이 틀림없을것이다 생각하고 할빈에 가도록 결정지었다.
안중근은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려비 100원(루블)을 장만하였다. 동지 우덕순을 청하여 이토히로부미를 죽일 방책을 비밀히 약속한 다음 각각 권총을 휴대하고 10월 21일 오전 8시 50분에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났다. 그 당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할빈까지는 특별급행렬차, 우편렬차와 화물차 세가지가 있었다. 급행렬차는 할빈까지 직통하나 기차표 값이 너무 비싸기에 그만두고 돈을 절약하기 위하여 우편렬차를 탔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소리령까지는 2인이 다 3등차표를 샀고 소리령부터 수분하까지는 2인이 다 3등차표를 샀다. (그것은 수분하 세관에서 3등차는 검사가 엄하고 2등차는 검사가 관대하였기때문이다.)저녁 9시 25분에 수분하에 도착하여 세관의 검사를 무사히 통과하였다.
안중근과 우덕순은 러시아 말을 전혀 몰라 불편함을 느껴 수분하에서 러시아 통역을 얻으려 했다. 기차는 수분하역에서 한시간 9분이나 정착되여 있었다. 이 틈을 리용하여 안중근은 역 앞에서 병원을 차리고 있는 의사 유경집을 찾아갔다. 유씨는 그전에 안중근의 병도 봐주고 의금도 헌납한적이 있는 서로 가까운 사이였다. 안중은 가족을 맞이하기 위하여 할빈으로 가는데 러시아 말을 몰라 답답하니 통역 한사람을 구해줄수 없느냐고 부탁했다. 그때 마침 약재를 구입하려 아들을 할빈에 보내려던 참이였다면서 아들 유동하를 보내겠다고 대답하였다. 안중근은 수분하에서 할빈까지 3등 차표를 3장 사서 그 이튿날인 22일 저녁 9시 15분에 할빈역에 도착했다.
안중근 일행 세사람은 할빈에 도착한 후 "한국민회' 회장 김성백의 집에 숙박하였다. 김성백은 러시아 국적을 가진 사람으로 도리 레스나야가 28호(지금의 도리구 삼림가)에 거주하고 있었다. 김성백의 넷째 막내동생과 유동하의 녀동생이 약혼한 사이니까 김성백과 유동하는 사돈간이였다. 유동하는 부친이 약재를 사러 보내서 왔다고 하고 그전에 수분하 유동하의 댁에서 김성백을 만나 서로 안면이 있는 안중근은 가족을 영접하려 할빈에 왔다고 하였다. 열정적인 김성백은 반가와 하면서 그들을 숙박시켰다. 안중근은 할빈에 처음으로 왔다. 이튿날 시내정황도 알아보고 거리도 익숙히 하기 위하여 아침 일찍 거리에 나왔다. 먼저 리발소에 가서 머리를 깎았다. 그리고 중국인 상점에서 외투를 사 입었다. 당시 할빈시의 총 인구는 5만 7천여명이였다. 할빈에 거주하는 268명의 조선사람은 대부분이 고려가(지금의 도리 서8도가)부근에 거주하고 있었다. 그 부근에 조선사람들이 꾸리는 '동흥학교'가 있었다. 안중근은 이 학교의 교원 김형재, 탁공규와 러시아부인을 얻고 세탁소를 꾸릴 준비를 하고 있는 조도선을 만나 정황도 알아보고 소식도 탐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