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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한국인의 '사랑의 집' 감동 스토리
http://hljxinwen.dbw.cn   2008-12-03 14:16:24
 
 
(흑룡강신문=하얼빈 2007. 01.09) 
 

"요놈들이 자꾸 나를 아버지라 부르니 이곳  떠나지 못하게 되였습니다"

"사랑의 집" 전경

 

"요놈들이 나를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안아달라고 조를 때마다 내 마음은 형언할 수 없는 애수에 젖어 듭니다.이 피덩어리들을 버리고 어떻게 가겠습니까"라고 측은한 눈길로 천진란만한 어린이들을 보면서 기자에게 설명하고 있는 한 중년사나이, 그가 바로 "사랑의 집(원장)"을 운영하고 있는 김학원(한국인,남,1958년생)씨이다.

 

김학원씨가 연길에 발을 들여 놓은 것은 1992년3월 즉 중한수교가 이루어지기 몇 달 전이였다.그가  연길을 찾게 된 것은 그럴 만한 사연이 있었다.

 

가문에서 7남매 중 여섯째로 태여 난 김학원씨는 어머니의 얼굴을 익힐 사이도 없었다.

 

"어른들의 얘기에 따르면 어머니가 세상을 떴는 데도 내가 어머니의 젖꼭지를 물고 있었다고 합니다. 제가 초등학교(소학교) 5학년 때에 우리 집에 들어왔던 계모가 떠나게 되였는데 그때 울면서 어머니를 찾아 다녔습니다. 그래서 동네에서는 저를 울보라고 했습니다.나를 낳아 준 어머니는 어머니라고 불러 보지도 못했지만 계모의 사랑이 얼마나 그리웠던지 집을 몰래 떠났어도 계속 애타게 찾았습니다"고 김학원씨는 무거운 마음으로 그때의 정경을 회고했다.

 

그후 아버지도 그가 고등학교(고급중학교)를 다닐 때에 저 세상으로 갔고  7남매 중 3남매가 선후로 세상을 떠가면서 현재 4남매만 남아있다고 한다.

 

이런 가슴아픈 사연이 그의 가슴속에서 지워지지 못했다 저 멀리 중국 연변에도 나와 같은 운명을 가진 어린이들이 분명 있으리라 생각하고 아내와 함께 연길시에 첫 발을 들여놓게 된 것이 인젠 장장 14년이란 세월이 흘렀단다.그는 연길시에 첫 발을 들여놓으면서 그 무슨 뚜렷한 후원이 있어 용기를 가지고 이 일을 시작한 것도 아니고 바로 그 가슴 쓰라린 상처이기 때문이였단다.

 

처음 연길에 왔을 때, 버려진 아이들이 적지 않은 것을 목격하게 된 김학원씨는 "사랑의 집"인 고아원을 설립하기로 작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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