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룡강신문=하얼빈 2006.01.12)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의 정감세계는 점점 메말라듬과 동시에 마음속에는 돈이라는 존재가 서서히 자리잡기 시작하였다. 오늘날 돈이라는 이 외나무다리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울고 웃는 희비극을 만들어가고 있는지 모른다.
남편이 한국에 나간 2000년도에 나는 처음으로 시어머님과 반목이 생겼다. 시누이가 남편을 한국에 보내면서 꾼 리자돈을 먼저 물어주기 위해 남편은 시어머님한테 돈을 부치게 되였다. 남편은 나한테 시어머님한테 가서 생활비 2000원을 가져다 쓰라고 전화를 했다. 휴식날 내가 시어머님한테 갔더니 시어머님은 나한테 1500원만 주는것이였다. 군말없이 돈을 받았지만 나는 속으로 불쾌하기 그지없었다.
두달후에 내가 또 생활비를 가지러 가겠다고 시어머님한테 전화를 했더니 시어머님은 남편이 보내온 돈과 둘째 며느리가 보내온 돈을 급한 사정이 있는 둘째 며느리 오빠한테 꿔주었으니 당분간 돈을 줄수가 없다고 하는것이였다. 시어머님이 나를 믿지 못해서 꾸민 거짓말이 아닐가? 나는 생각할수록 억울했다. 그때 골질증식이란 병으로 허리를 쓰지 못해 출근도 못하는 나는 생활비도 없었지만 치료비만도 한달에 몇백원씩 쓰는 상황이였다.
그때로부터 나의 마음에는 옹이 박혔다.
남
내
70고령인 시어머님한테 15살에 나는 딸을 맡기고 캐나다로 간다며 떠난 시누이는 공항에서 다른 사람의 머리 대신 바꾸어놓은 려권이 발각되여 수용소에 갇혔다가 석달만에 풀려나왔다. 사기당한 돈을 찾는다며 북경에서 헤매던 시누이는 뒤늦게야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정신이 오락가락하게 되였다. 욕심끝에 화가 온다고 이렇게 남편과 시동생이 한국에서 번돈과 올케가 일본에서 벌어온 돈 십여만원이 시누이의 캐나다꿈과 함께 하루아침사이에 이슬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인제는 남편도 올케도 다시 벌어야 한다며 집으로 돌아오지 않고 있으니 언제가야 한가족이 함께 모일수 있을런지 미결이다. 인정많고 화목하던 가정이 파탄된것이 어찌 김씨네 한가족뿐이랴? 아무리 돈이 으뜸인 세상일지라도 부모님의 로고도 자식의 전도도 형제의 생사도 고려없이 무작정 외국돈벌이만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다시 한번 가슴에 손을 얹고 깊이 생각할바가 이닌가싶다. /애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