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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문학을 하지 ?
//hljxinwen.dbw.cn  2020-06-22 09:53:46

우상렬/연변대학 교수

  (흑룡강신문=하얼빈) 우리는 이미 자연스럽게 본능적으로 문학을 하고 있거늘 왜 생뚱 같은 소리를 하지? 우리 조선족사회는 다른 것은 잘 모르겠지만 문학 열기는 아직 한창이다. 지역적으로 흑룡강조선족문학회, 요녕조선족문학회, 청도조선족문학회, 여기에 재한조선족문학회…연변만 놓고 보아도 시인협회, 어머니수필회, 단풍수필회…… 그리고 80~90세대도 내노라 만만치 않게 치고 올라온다. 언젠가 대두된 조선족문학 침체우려는 어쩌면 기우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 문학은 우리 삶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다.

  문학은 우리 인간이 동물과 구별되는 기본특징의 하나다. 어쩌면 그것은 인간이 인간으로 되는 기본지표의 하나가 되겠다. 인간은 배가 고파도 문학을 하고 배가 불러도 문학을 한다. 그래서 일찍 중국 한대에 배고픈 자는 그 배고픔을 노래하고 배부른 자는 그 배부름을 노래한다고 했다. 문학이 인간의 희로애락을 나타낸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렇다. 인간은 표현욕구가 있다. 그래 언론자유, 출판자유는 우리 현대인간들의 기본자유가 아니던가. 인간은 즐거움은 나누면 배가 되고 고통은 나누면 반으로 줄어든다고 한다. 그래서 희로애락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문학은 이런 희로애락의 가장 집중적인 표현이 되겠다.

  시는 전형적으로 이런 희로애락의 표현을 위하여 생겨나고 존재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시는 서정이라 하지 않던가. 사실 서사작품도 마찬가지다. 톨스토이는 문학에 대한 자기의 이해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바로 자기가 현실에서 느꼈던 희로애락을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로 느끼게 하기 위하여 자기가 희로애락을 느끼게 된 정경이나 이야기들을 그대로 재현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것을 감정표현설이라고 한다. 그렇다. 인간의 정신세계 가운데 이 감정이야말로 가장 강렬한 에너지로서 걷잡을 수 없는 용암처럼 수시로 분출구를 찾아 헤맨다.

  따라서 이 감정을 제대로 발산하지 못할 때 정신질환에 걸리거나 정신병자가 되거나 정신적으로 붕괴된다. 그래서 여러 경로를 통하여 이런 감정이 발산되도록 해야 한다. 정신분석학에서 가장 고민하는 문제의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문학은 억압된 욕망의 승화, 문학은 백일몽, 문학은 대리만족-카타르시스…… 바로 문학을 감정의 문제, 감정놀음으로 본 것이다. 선녀와 나무꾼의 이야기, 견우직녀이야기…그래 이런 고전적인 꿈속에 색시 얻기 이야기가 장가 못 간 노총각들의 로망으로서 그들의 한 맺힌 감정을 카타르시스해주지 않은가. 그리고 좋은 사람이 좋은 보응을 받고 악한 사람이 악한 보응을 받는 고진감래 식 대단원을 이루는 우리의 고전들이 그 암흑한 봉건시대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막막한 삶을 살았던 풀뿌리인생들에게 있어서 역시 하나의 카타르시스가 아니겠는가. 그렇다. 문학은 감정표현이 하나의 포인트가 된다. 작가가 감정을 발산하든, 독자가 대리만족을 받든…문제는 감정표현을 어떻게 하는가하는 것이 문제다.

  실생활에서처럼 즐겁다거나 고통스럽다를 련발하는 등 원색적이고 직설적으로 표현해서는 안 된다. 문학이 생활의 반영이라 하지만 이것은 예술적이 못 되여 안 된다. 문학은 우회적이며 감칠맛이 나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시에서 서정토로를 할 경우에도 이미지화를 강조한다. 시적 대상화, 객관상관물, 보조관념 등이 바로 이것을 말해주고 있다. 한마디로 감정에 형상의 옷을 입히기다. 그래 그것은 들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볼 수 있고 맡을 수 있으며 만질 수도 있다. 보다시피 이렇게 감정이라는 것이 우리의 오관 내지 제6감각을 자극하며 다채롭게 형상적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이에 우리는 자기도 모르게 이런 형상에 녹아들며 감정적인 공감대를 형성한다. 문학은 실로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작가와 독자의 감정공감지대.

  예술은 영원하고 인생은 유한하다는 말이 있다. 문학에도 해당되는 말이다. 현재 아무리 백세시대라 하지만 백세살기 힘든 세상이다. 사실 천세, 만세를 바라보는 인생일진대 인간은 가련하다. 그럼 이런 인생실존의 한이나 비극을 어떻게 갈무리하지? 인간은 똑똑하다. 기러기는 소리를 남기고 범은 가죽을 남긴다지 않던가. 그럼 인간은 무엇을 남기지? 종족번식, 제2세를 왕창 만들기다. 그런데 이것으로 성에 차지 않다. 이것이 육체적인 본능차원이라면 그 어떤 보다 높은 정신적인 차원이 필요한 것이다.

  인간은 필경 정신적인 동물이니 말이다. 그래서 우리 중국의 전통적인 영원, 영생추구는立言,立德,立功으로 정립된다. 여기서立德이 도덕군자가 되여 영원히 따라 배울 인간의 사표가 되는 것이라면立功은 민족이나 나라에 큰 공을 세워 사람들이 영원히 기리게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뢰봉을立德의 대표인물로 볼 수 있다면 세계 주산핵산기록에 도전하는 우리 조선족 오미란을立功의 대표인물로 볼 수 있겠다. 그러면立言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훌륭한 글을 남겨 이 세상에 영원히 읽히도록 하는 것이다. 여기에 우리 문학창작이 포함됨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물론 고전적 명작들을 창작해야 한다. 그래야 세세대대로 감상하며 영원성을 띠게 된다.

  문학은 희로애락, 그리고 진, 선, 미를 추구하는 인간본질의 가장 확실한 대상화로서 정신적인 제2세의 결정체에 다름 아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은 자기도 모르게 너도나도 문학이다. 내 작품이야 말로 최고 명작 같은 착각 속에서 말이다. 그런 만큼 그것은 가장 확실하고 사랑스러운 제2세로 안겨온다. 그래 내 자식이 이 세상에 제일 곱지!文人相轻-문인 사이 서로 얕잡아 보기는 이로부터 생겨난다. 따라서 우리 평론가들이 누구의 작품을 이러쿵저러쿵 문제 삼는 것도 밉상사기는 마찬가지.

  문학은 천부와 끼로 해먹는다. 물론 아인슈타인의 1%의 천부에 99%의 노력이라는 말도 통할 때가 있다. 문학적 천부와 끼가 있을 때 언젠가는 문학을 하게 된다. 연변의 어머니수필회나 단풍수필회의 어른들을 보면 젊었을 때 문학을 하고 싶었는데 살기가 어렵다보니 문학을 하지 못한 분들이 많다. 그래 이제 정년퇴직을 하고 여유로워지자 문학적 천부와 끼가 발동되면서 다시 문학을 하게 되였다.

  그런데 이 문학 같이 좋은 것도 없다. 내가 좋아서 했는데 일단 발표되니 이름이 나고 원고료도 챙기게 된다. 그야말로名利双收-명예와 이익을 동시에 얻게 되는 것이다. “어, 니 수필 발표했더라, 참 재미나게 봤어. 니 그런 재간 있는 줄을 몰랐네.” 마음속으로 은근히 얼마나 기뻐나는지 모른다. 누가 알아주지 않던가. 여기에 원고료까지 주어지니 실로 금상첨화다. 요새 원고료도 그만하면 괜찮다. 한어창작의 경우는 워낙 독자층이 많아 원고료로 먹고 살만하다. 그래 아예 프리랜스로 전문 문학창작에 종사하는 작가들이 출현하기도 한다.

  문학을 왜 하지 하면 심심해서 한다고 하는 사람이 많다. 반복되고 따분한 현실이 너무 재미없어서 말이다. 그래서 이 반복되고 따분한 현실을 떨쳐버릴 좀 재미나는 무엇을 찾아 문학을 한단다. 문학의 유희설이라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다. 현재 폭력, 섹스, 변태 등 자극적이고 재미를 추구한 통속문학은 어떤 의미에서 이런 문학인 것이다.

  사실 문학의 유희설은 일반 독자들한테서 더 잘 나타난다. 심심한테 소설이나 보지. 사실 일반 독자들이 문학을 접하는 주된 동기는 바로 심심함에 있는 것이다. 그래 자유자재로 재미나고도 교묘하게 픽션으로 엮은 소설을 많이 보게 된다. 문학은 이렇게 인간의 유희본능을 만족시켜준다.

  일반적으로 문학의 사회 역할을 놓고 보면 그것은 인식역할, 교육 역할 및 심역할로 나뉘여 진다. 그런데 이것은 분석의 편리를 위해 인위적으로 나눈 것이지 사실 인식역할과 교육역할은 심미역할을 통하여 진행된다. 바꾸어 말하면 심미역할 속에 인식역할과 교육역할이 녹아들어 있다고 보면 되겠다. 독자들은 문학작품을 감상하는 즐거움 속에 자기도 모르게 작품에 반영된 객관적 사항들을 인식하게 되고 작가의 주관사상경향을 받아들이며 교육 받게 된다.

  이런 인식과 교육은 일반적인 따분한 전문 인식이나 교육과는 다르다. 그것은 즐거움 속에서 진행되는 만큼 자연스럽고 달가운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백과전서적인 종합성을 띤 인식이고 형상적이고 구체적인 확실한 교육이다. 이로부터 문학의 정신양식이라는 말이 생겨나기도 했다. 한마디로 문학을 인간학이라 할 때 인간의 육체와 심리에 대해 백과전서적이고 종합적인 인식을 가져오며 진, 선, 미의 인간적인 교육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항상 미래에 산다. 현실은 항상 불만족스럽다. 그래서 인간사회가 발전하는 줄로 안다. 우리는 중세 암흑기를 넘어 근대를 딛고 현대로 들어섰고 현재는 포스트모던시대까지 왔다. 물질적인 삶의 질은 높아졌는지 모르겠지만 정신적인 행복지수는 영 말이 아니다. 우리는 이른바 현대병에 시달리고 있다. 그래 요새 이런 현대병을 치료할 대안으로 문학이 많이 거론되고 있다. 문학치료학이 바로 이런 것이다.

  인간의 모체인 자연과 떨어져있는 우리는 어쩐지 허전하고 불안하다. 그래 전원목가적인 천인합일의 문학경지가 우리를 원천적으로 즐겁게 하지 않던가. 그리고 우리는 욕망팽창 일로만 달리며 공리성에만 매달리다보니 감정적으로 너무 메말라 있다. 그래서 우리는 감정의 감로수가 필요하다. 그래 한 편의 서정시가 우리를 촉촉이 젖어들게 하지 않던가. 그리고 청춘드라마의 순진무구한 사랑이 우리를 순간이나마 청춘의 순진함으로 되돌려놓지 않던가. 그리고 아이들의 꽃이랑 풀이랑, 나비랑, 토끼랑 같이 놀아나는 동화세계가 우리를 즐겁게 하지 않던가.

  우리는 이때까지 너무 인간중심으로만 흘러왔다. 결과적으로 생태균형이 파괴되였다. 지구가 몸살을 앓고 있다. 생태문제는 우리 인간의 보편적인 공감대를 형성하는 초미의 시급한 문제가 되고 있다. 그래 생태주의운동이 대두하고 우리 문학에도 생태문학이 나타났다. 문학은 시대의 청우계의 하나가 되고 있다. 그래 미국의 1960년대 ‘이 황막한 봄날’이 우리에게 경종을 울려주며 생태의식을 불러일으키지 않았던가. 문학에서의 생태문제취급, 즉 생태문학은 문학의 다른 한 존재리유가 되겠다. 문학은 실로 시대와 더불어 발전하며 끊임없이 자기의 존재리유를 확보하기도 한다.

  보다시피 문학에 있어서 인간의 표현욕구, 생명의식,名利双收, 유희설 및 문학의 사회역할, 문학치료학, 생태문학은 인간실존과 필연적으로 관계되는 삶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다. 그러니 우리는 문학을 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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