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곡절속에서 다시 희망의 끈을 잡고
그런 김교수가 얼마든지 국내 최고의 대학으로 갈수 있었지만 "색맹"이라는 "벽"앞에서 어쩔수 없이 일류대학을 포기하고 연변대학을 선택했다.
그렇게 1955년부터 시작된 연변대학생활, 당연한듯이 또 기다렸다는듯이 김교수는 물리학과를 선택했다. 오랜 시간 동안 싹틔워왔던 꿈이 드디여 결실을 맺었다. 분투와 랑만 그리고 미래에 대한 동경으로 가득찬 그 대학시절을 김광성교수는 마치 물리학을 위해 태여난 사람처럼 자세 한번 흐트러지지 않고 자신이 선택한 물리학전공에 몰두했다. 길림대학 물리학과에 있는 동창한테 어렵게 학습필기까지 부탁해가면서 자신의 지식면을 넓히려 애썼다. 김광성교수는 대학시절의 방학이 그렇게도 좋았다고 한다. 다름이 아니라 방학을 리용해 수학과 화학 면의 지식을 습득할수 있었기때문이였다. 4년 내내 모든 학과목에서 만점의 성적을 자랑한 김광성교수는 원래 연변대학에 배치받을 자격이 충분했다. 하지만 1957년 반우파투쟁에서 억울한 사람을 두둔해나섰다가 1959년 졸업시 중학교로 배치받게 됐다.
당시 이 사실을 알게 된 림민호교장은 친히 사실을 자세히 료해하고 시정해나섰다. “이 학생은 4년 내내 만점을 맞은 근면하고 성실한 인재이다. 꼭 연변대학에 남겨야 한다.” 우여곡절끝에 김광성교수는 연변대학에 배치받아 물리학연구를 계속할수 있게 됐다.
“연변대학은 나의 학술연구의 요람이였어요. 본격적인 학술연구는 그때로부터 시작됐다고 봐야지요.”
당시는 “이름을 날리고 전문가가 되는” 성명성가사상이 농후한 때였다. 김광성교수도 그런 생각이 없지 않아 있었다고 털어놨다. 동력이야 어디서 근원했던 김광성교수는 연변대학 도서관에 틀어박혀 세계 각국의 학술잡지들을 년대별로 차근차근 훑으면서 학습의 무아지경속에 빠져들어갔다. 공부밖에 모르는 그가 어찌나 걱정됐는지 만나는 사람마다 “건강에 주의하게” 하고 당부를 했다고 한다.
얼마후 연변대학에서는 김광성교수에게 길림대학 연수기회를 마련해줬다. 김교수는 당시 길림대학에서 반도체물리학을 연구한 고정산교수의 제자가 되여 고체물리학, 반도체물리 등에 대해 깊이있게 연구, 학술면에서 큰 진보를 가져왔다. 김교수는 연수기간의 1초가 너무 아까와 밥먹고 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단 1초도 다른데 할애한적 없었다고 얘기했다. 연수기간 그는 길림대학의 물리, 수학, 화학 등 전공을 가리지 않고 거의 모든 석사연구생 수업을 방청했다.
하루종일 아무 말도 없이 책만 들여다보는 그의 모습은 기숙사의 변함없는 풍경선이였다. 한창 연찬의 길에서 자신의 꿈을 영글리며 남부러울것이 없던 김교수, 세상은 또 한번 그를 울렸다. 1964년, 그는 모택동의 호소를 받들어 농촌으로 빈하중농의 재교육을 받으러 내려가게 되였다.
김교수는 그때 자신의 교과서와 책들을 몽땅 던져버렸다. 마음을 비우고 농촌에서 수굿이 일만 했다. 시간은 흘러 문화대혁명도 끝나고 왕청의 어느 두메산골 생산대에서의 2년 세월도 흘러갔다. 1972년 중학교 교원으로 교편대를 잡아서 6년 세월이 흐를 때까지 모든것을 다 털어버리고 열심히 일했다. 그것이 응당한것이라 생각했고 자신을 키워준 사회에 대한 보답이라고 자신을 달랬다.
그러다 1978년 연변대학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 뜨거운 눈물이 앞을 가렸다. 지난 세월이 주마등마냥 머리속을 스쳐지나며 도무지 마음을 가라앉힐수 없었던것이다. 십여년의 세월이 쓸고지나간 자리는 그토록 처량했다.당시 물리학에 관해서는 머리속이 텅텅 비여 백지상태였다고 김교수는 회억했다. 하지만 그즈음에 김교수는 농촌생활의 단련을 받아 몸도 마음도 훨씬 강해져있었다. 그래, 해보자, 초심으로 돌아가서 다시 시작해보자!
김교수는 머리를 질끈 동이고 팔을 걷어붙였다. 밤을 패고 끼니를 거르면서 따로 휴일도 없이 기초지식부터 알차게 다져나갔다.
학생들의 강의를 준비하고 교과서를 편찬했으며 석사연구생 지도를 겸하면서 눈코뜰새없이 바쁜 와중에도 시간을 짜내 도서관을 찾았다. 당시 세계 고체물리학리론이 어느 수준까지 발전했는지 동태를 살피고 연구과제를 선택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자신이 봐야 할 지난 10여년간의 학술잡지들을 책상우에 차곡차곡 쌓아놓은 뒤 본격적인 연구에 몰입했다.
김교수는 십여년간의 농촌생활이 없었더라면 지금의 자신도 없다고 한다. 비록 몸이 고달프긴 했지만 밥맛도 돌고 잠도 잘 왔으며 무엇보다도 성명성가사상이 저도모르게 사라졌던것이다. 그 시절은 그야말로 김교수의 몸과 마음을 건강히 가꿔준 정화의 시절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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