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시작된 배움의 길, 학교다니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학교와 20리 상거한 집에서 매일 통학하려니 매일 동이 트기전에 집문을 나서야 했기에 그는 아침을 먹을 시간도 없었고 점심도시락을 싼다는것은 꿈도 꾸지 말아야 했다. 아침도 못 먹고 오전수업 내내 배고픔을 참으며 강의를 듣다가 점심이 되면 남의 눈길이 의식돼 아무도 없는 구석을 찾아 조용히 배고픔을 삭혔다. 수업내용도 처음에는 뭐가 뭔지 도무지 갈피를 잡을수 없었다. 일본소학교를 다니다나니 조선어를 잘 모르는데다 그사이 남들보다 뒤처진 진도가 어림잡아 2~3년은 됐기때문이다.그 와중에 청천벽력같이 유난히 믿고 따르던 아버지마저 세상을 뜨게 되고 가세는 더더욱 몰락했다. 그는 짬만 나면 이붓어머니의 농사일을 도우면서 어린 나이임에도 집에 책임을 다하려 했다. 그런데 한번은 이붓어머니로부터 논두렁에서 핀잔을 듣게 되고 어린 마음에 상처를 입은 그는 이미 장가를 간 형님네 집으로 달아나버렸다…
어린 나이에 그 많은 일을 겪고 방황할법도 하련만 김교수는 꿋꿋했다. 어렵게 잡은 공부의 기회가 소중한것도 잘 알고있었고 무엇보다도 그는 결심하면 해내는 성격의 소유자였기에 자신에게 추호의 머뭇거림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오로지 공부 또 공부였다. 그는 학교생활에 적응하며 차츰 상위권학생들과의 거리를 좁혀가더니 미구에 1등의 자리를 차지했다. 김교수는 그때 무엇보다도 자신의 적성에 맞는 물리공부에 각별한 흥취를 나타냈고 평생 물리연구를 하련다는 꿈을 가슴속에 싹틔웠다고 고백했다.
성적이 줄곧 1위를 차지했던 김교수는 1952년 중학교졸업시 수석에게만 주는 혜택, 통화시고중으로 추천받는 자격을 가졌다. 지독한 가난속에서 그는 국가에서 내려오는 조학금 5원으로 근근득식 끼니를 에울수 있어 그나마 다행이였다. 그렇게 그는 고중시절도 내내 최우등으로 성적표를 장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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