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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삻 나의 꿈]잃음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들
//hljxinwen.dbw.cn  2018-09-29 09:45:02

박연희(한국)

  (흑룡강신문=하얼빈)개혁개방의 물결은 조선족이 집결돼있는 동북 3성에도 어김없이 흘러들었다. 오랫동안 닫혀있던 대문이 활짝 열리고 우리도 드디어 바깥세상을 구경할 수 있게 되었다. 문을 여니 넓은 밖이 보였고 눈을 뜨니 트인 길이 보였다. 1988년 서울올림픽은 한국이 헐벗고 굶주리는 사회가 아니라 잘 먹고 잘사는 자본주의 사회라는 실상을 알게 되면서 한국에 대한 우리들의 선입견을 버리게 했다.

  사회주의 체제에서 잠자고 있던 우리들의 의식은 깨어났고 관념의 전변을 불러오게 되었다. 개혁개방이 후 중한수교와 더불어 조선족 사회는 도시화, 세계화로 나가는 격변의 중심에 놓이게 되었다. 보다 나은 삶에 대한 갈망과 부에 대한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많은 조선족들이 삶의 터전을 한국으로 옮기게 되었으며 지금은 86만 명이란 조선족들이 한국에 거주하고 있다.

  그전 세월 같으면 방송 일을 그만두고 외국으로 나간다는 것은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2010년 말에 잘 나가던 방송사 일을 그만두고 나도 어여 남쪽으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한국에서도 쉬운 일만 하면서 돈을 벌 줄 알았다. 처음 한 신문사에서 90만 원의 급여를 받았는데 월세와 밥값, 교통비에 핸드폰 요금까지 까고 나니 나머지가 별로 없었다. 당장 아들애의 대학등록금을 보내줘야 하는데 폼만 잡고 있을 수가 없었다.

  처음으로 식당일을 시작했다. 주방도 서툴고 서빙은 엄두가 나지 않았다. 쌓여가는 그릇들을 쉴새없이 닦아내도 끝이 보이질 않았다. 방수용 앞치마를 입었지만 옷이 축축이 젖어 들었고 손은 뜨거운 물에 퍼져서 죽은 사람 손처럼 희멀겋게 되었다. 허리 펼 시간도 없었고 화장실에 다녀오면 더 높이 쌓이는 설거지가 두려웠다. 일이 쌍놈이라고 밥은 한 끼에 두 그릇을 먹어도 늘 허기졌다. 하루 12시간 일을 마치고 저녁이면 밥 먹을 힘조차 남지 않는다. 전철을 한 시간씩 타고 집에 돌아와 씻지도 못한 채 이불 속에 코를 박았다가 이튿날 그 속에서 헤어 나와 다시 전쟁터로 행했다.

  6일간 죽자 살자 일하고 휴무가 돌아오면 음식을 거른 채 하루 종일 잠만 잤다. 식당일을 그만두고 호텔 청소를 시작했다. 하지만 여기도 또 다른 전쟁터였다. 양쪽에 물통을 끼고 빈방이 나지만 4명이 한 조로 되어 쏜살같이 달려가 후다닥 청소를 마쳤다. 중국에서 살던 나에게 그렇게 많은 콘돔을 본다는 것은 쇼크 그 자체였다. 정신없이 층계를 오르락 내리락 하다 보니 며칠이 지나지 않아 종아리와 발바닥이 아파서 엉덩이를 실룩거리며 걸었다. 이를 보던 사장님은 '이 언니가 엄살이 엄청 많네.'라며 비꼬아댔다.

  호텔에서 나와 부잣집 가정부로 들어갔다. 몸뚱이는 아꼈는지 몰라도 스트레스가 많았다. 시집살이도 해보지 못한 나에게 평생에 그런 눈치살이는 처음이었다. 아이 둘, 40대의 젊은 부부와 60대의 본가집 부모와 치매에 걸린 90세 넘은 노모가 이 집의 가족성원이었다. 하루 세탁기를 3번은 돌려야 했고 매일 이불을 옥상에 털어 말리고 오후에는 반 시간에 한 번씩 들어오는 과외선생님들에게 커피와 간식, 과일을 챙겨가느라 손발이 쉬지 못하고 있는데 사모님은 퇴근 시간이 가까워지면 요것조것 시키면서 제시간에 퇴근시키려 하지 않았다. 더 한심한 것은 점심을 빵조각으로 해결하라고 해서 도시락을 사서 다녔고 달걀이 빨리 없어진다고 해서 계란 한 개도 마음대로 먹을 수가 없었다. 그보다 더 힘든 것은 매일 집을 뛰쳐나간 노모를 찾느라 도저히 집안일을 할 수가 없었다. 급여를 10만 원을 올려줬지만 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도 벅찼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식당에 들어갔다. 이번에는 홀이었다. 같은 한국말인데 손님들의 주문도 잘 알아듣지 못했고 영어로 된 메뉴들이 많아서 알 수가 없었다. 다시 쫓겨서 주방으로 갔다. 죽집에서 열심히 죽을 저었다. 2년 후 오른팔 겨드랑이에 석회가 쌓여 수술해야 한다는 진단이 나오자 별수 없이 일을 접고 중국으로 돌아갔다.

  2개월을 넘기지 못하고 다시 한국으로 나왔다. 하늘이 도왔는지 운 좋게 한 국회의원의 비서로 취직이 되었고 지금은 외국인 글로벌센터에서 중국 상담사로 일하면서 동포사회와의 네트워크구축에 힘을 내고 있다.

  개혁개방으로 나는 지지리도 가난한 삶에서 벗어나 풍요로운 부유를 얻었다. 렌즈도 망원도 버리고 광각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었다. 한국의 문화와 력사뿐만 아니라 조선족의 력사를 배우게 되었고 중국에서 생활하면서 지켜본 중국, 한국, 조선, 그리고 한국에서 보고 느낀 한국과 조선 그리고 중국은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사단법인 '조각보'에서 일본, 한국, 고려인, 중국 등 이주녀성들과 6년간 '다시 만난 코리안 녀성들의 삶 이야기' 프로젝트도 진행하면서 다른 나라에서 살아가는 녀성들의 삶을 알게 되었다. 차별과 무시 속에서 살아온 조선적 일본 녀성들의 이야기, 한글도 모르고 한국어도 익숙하지 않아 힘들게 살아가는 고려인 녀성들의 이야기, 행복하게 살 줄 만 알았던 한국녀성들의 삶 이야기를 통해 서로에 대한 편견을 없애고 서로를 알아가는 좋은 기회를 얻게 되였다.

  조선말과 조선 글을 잃은 대신에 한국어를 제대로 구사하고 정확한 한국 글로 쓴 수필, 수기, 칼럼 130여 편을 신문 지상에 발표하였고 앞으로 한 권의 책으로 정리할 계획이다.

  나서 자란 고향은 추억으로 빛바래졌지만 제2의 고향 한국을 덤으로 얻었다. 중국에서 살 때보다 더 중국을 사랑하고 사회주의를 선호하게 되었다. 통역과 번역 때문에 중국에서는 아예 쳐다보지도 않았던 '신화사전'을 주문했는데 택배를 받는 순간 그처럼 감동할 수가 없었다. 한국사회에서 조선족의 이미지는 살인, 보이스피싱, 사기 등으로 락인되여 있다. 조선족의 이미지 개선을 위해 한 한국시민단체와 함께 중국동포 모니터링 단을 구성하고 단장 직을 맡았으며 중국동포 –우리는 이웃이라는 캠페인인 “참 고맙습니다”를 일 년 동안 진행하였다. 한때 이슈로 되었던 대림동을 범죄의 소굴로 표현한 ‘영화 ’청년 경찰‘ 상영금지 시위행진과 기자회견도 동포단체들과 함께 진행하였다.

  우리가 잃은 것은 우리가 얻은 것보다 더 아름다울지도 모른다.잃음도 얻음도 인간이 성숙 되어가는 하나의 과정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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