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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필∙ 주소 없는 고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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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9-27 15:04:49
 
     
 

  (할빈) 리춘화

  8년간 고향을 잊고 살았다. 인제 그곳에는 언제나 토장국처럼 모락모락 향을 개여올리는 어머니도 일가도 없기때문이였다.

  왠지 바다가 잇달아 떠오르게 하는 엄마다. 인제는 어연 10년이 지났건만 아직도 완전히 아물지 않은 슬픔의 근원이기도 하다.

  이런 엄마를 잃은 나에게 고향은 한없이 멀어만 갔었다.

  그런 나는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고향을 찾아가게 되였다. 오래도록 잊고 살았지만 고향이 가까와질수록 보고싶고 알고싶은것들이 너무 많았다. 고향사람들의 현 상황들이였다.

  잊고 산것 같지만 기실 고향에 관한 추억은 언제나 가슴 깊이 따뜻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너무 오래 그곳에서 살았기때문일가? 대도시에서는 찾기 힘든 오아시스 같은 색다른 풍경때문이기도 할것이다.

  내가 살던 마을은 현소재지 역전에서 5분간 걸어들어가면 닿는 '도시속의 농촌'인 아담한 단층집 동네이다. 송화강 농기계공장의 사택으로서 조선족들이 많이 모여살면서 동내가 뜨들썩 자신의 분위기와 맛을 한껏 뽐내며 월경민족으로서의 외로움을 달래던 그런 공장마을이였다. 우리의 부모들은 거의 한국 또는 조선에서 들어온 1세대들이고 좀 년세가 많은 분들로는 조선전쟁에 나갔던 분들, 인민군대에 편입됐던 분들도 있었다. 원래는 모두 할빈에서 살았는데 큰 도시 생활이 이모저모 불편하고 농촌 생활이 그리워 이사간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한어를 서툴게 구사하는 사람이 많았고 문맹도 많이 있었지만 공장의 공장장 등 령도들이 조선족이고 한 동네에 살고 있어 불편함은 크게 없었다. 한족들이 오히려 조선족과 친하게 지내려고 애쓰던 그런 별란 마을, 조선족의 전통을 고스란히 지켜오던 그런 마을이였다.

  저녁후면 비슷한 또래끼리 마실돌이를 다녔고 여름에는 시원한 울안에 쪽걸상을 놓고 앉아 해바라기를 까면서 세월아 네월아 하며 이야기판을 벌리던 곳, 설 명절이면 남정들이 찾아들어 술상 차리고 설 인사 올리고, 평시에도 좀 색다른 음식이 있어도 서로 돌리였으며 잔치나 환갑이 있으면 동네 아낙네들이 자기 일처럼 팔소매 걷어부치고 나서는 그런 마을이였다. 또 누구 집에 어떤 기물이 있고 살림살이 솜씨는 어떻고 손금 보듯 들여다 볼수 있는그런 마을이였다. 지난세기 50대부터 시작하여 줄곧 그렇게 재미있게 지내던 마을이였다. 물론 자식들이 출세하여 떠난 집도 있지만 해마다 철새마냥 찾아오기도 하는, 미련이 많은 곳, 사람 끓던 동네였다.

  창문뒤의 터밭에서 상추, 당콩, 오이를 따먹었고, 울안이 큰 집은 개 닭 지어 돼지도 키우고…개짓는 소리, 수탉이 홰치는 소리, 애들이 장난치는 소리로 벅적벅적 사람사는 숨결 정다운 마을이였다.

  그런데 역전에서 멀지 않은 그곳에 택시를 타고 도착한 나는 화뜰 놀랐다. 마을이 간곳 없이 사라졌기때문이다. 흔적조차 없었다. 아무리 눈을 비비고 여겨보아도 그 위치인데 층집들만 즐비하다. 혹시나 하고 층집 전후를 돌아보았지만 역시 추억과 맞물릴 싱징물이 아무것도 없었다. 지어 나무 한그루 남아있지 않았다.

  아, 그때 밀려들던 허무감, 실의, 아픔, 향수를 달랠 지친 마음을 기댈 보금자리가 없어졌다는 감각, 마을의 력사가 끝났고 아무런 축제도 없이 기록도 없이 끝났다는 아픔이 진동했다. 어, 거기 누가 없소?! 마음이 웨치고 있었다.

  홀연 같은 기억을 가진 사람들이 너무 그리워졌다.

  그래서 무턱대고 그 자리에 일떠선 층집의 관리인을 찾아 조선족이 어느 집인가고 물었다. 마침 그 층에 조선족이 한 집 살고있다 하여 올라가 벨을 눌렀다. 나온 분은 마침 나보다 두살 우인 옥선이어머니였다. 우리는 서로 반색했다. 그리고 들어가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단층집들을 허문지는 4년이 넘었다니까 아마 2009년즈음이겠다. 그 뒤 층에 아직 한분이 더 살고 있고 지금은 많이 편찮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조금후 난 일을 처리하러 파출소에 갔고 저녁에는 다른 집에 병문안을 갔었다. 그리고 그 집에서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었다.

  그후 이틀동안 옥선이어머니 집에 머물면서 동네분들의 이런저런 후일담을 들었다. 년세 많은 분들은 세상뜨고 젊은 사람들은 한국으로, 대도시로 진출하고 옥선어머니는 아는것도 많으시고 기억력도 좋으시였다.

  다음날, 나는 옥선이어머니와 같이 1동부터 시작하여 14동까지 마을의 지도를 그리며 어느 집엔 누구 하면서 기억속의 원상복구를 시작했다. 아직도 누구집의 몇째 아들, 너무 어린 사람들은 이름은 무엇이지? 하는식으로 잊은 부분도 한 둘이 있었다. 이처럼 고향은 기억속에만 원상복구가 되여 오래도록 자리잡아갈 존재로 되고 말았다.

  동네 분들이여 다 잘 있죠? 부디 어디에 있어도 마을에 대한 따뜻한 기억을 안고 굳세게 잘 살아가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바입니다.

  일을 마치고 난 거리를 돌았다.

  고향에서 길을 헤매는 나는 외지에서 온 행객 같았다. 나의 차림새도 이 소도시에서는 좀 이색적이였다. 매 도시는 그로서의 분위기와 색채가 있음을 느끼게 되였다. 아, 도시들은 날따라 낯설게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있구나!

  흔적 없이 사라진 고향 마을, 고향의 주소는 파출소의 호적 관리부에만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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