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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민족간부 최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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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16 10:38:33
 
     
 

  대형계렬기획보도 《중국조선족 백년백인》 (17)

  

  최채

  《민족을 생각하지 않는 민족간부는 자격이 없다.》 중국공산당의 우수한 민족간부이며 조선족의 자랑스러운 아들, 영원한 민족간부 최채의 불후의 명언이다.

  최채는 1914년 11월 23일 조선 황해도 신천군의 독립운동가 최중호와 어머니 류중현 녀사의 장남으로 태여났다. 최채의 원명은 최윤상이다.

  조선이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되후 1920년 7살 되던 해에 최채는 김구를 따라 독립운동에 참가한 아버지의 옷자락을 잡고 중국의 상해로 이주, 상해에서 조선아동들에게 민족주의사상교육을 실시하던 인성학교에 입학하였다. 1927년 그는 상해 혜중중학에 입학하고 학교의 아동단원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다가 1931년에 부친 최중호의 병이 위중하게 되자 학업을 중단하고 잡역에 종사하였으며 이듬해인 1932년에 중국신민주주의청년단, 반제동맹에 참가하여 본격적인 반일독립운동에 뛰여들었다.

  1931년 《9. 18》사변이 일어나자 최채는 상해한인청년동맹의 일원으로 항일구국운동에 참가했으며 그해 11월 상해한인반제동맹에 가입했다. 1932년 상해에서 《1.28》사변이 일어나자 상해말에 익숙한 그는 일제를 반대하기 위한 모금 선전활동에서 한몫을 톡톡히 담당했다. 일제가 상해와 남경을 점령한후 최채는 부평초마냥 무한과 장사로 떠다니는 신세가 되고말았다. 그후 1940년 3월 중경에 가서 아버지 최중호와 친분이 있는 독립운동가 김원봉을 찾아가 거기서 조선의용대에 참가하고 의용대 총부 선전조 간사로 활동하였다. 후에는 또 부대를 따라 태항산으로 진군, 팔로군의 통일적인 지휘하에 일제와 싸웠다.

  1942년 최채는 황하를 건너 연안으로 가는 길에 무정과 정일선을 만났다. 무정은 하룡장군의 부대에서 조선족간부를 수요하니 거기서 활동하라고 하였다. 이렇게 되여 결국에 그는 연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팔로군 제120사 정치부 적공부에서 전선을 지원하는 적후사업을 시작하게 되였다. 그는 적공부에서 사업하면서 화북조선독립동맹 진수분맹을 조직하였고 적공부의 파견을 받고 태원시교 유격구에서 태원시내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에 대한 사상사업을 시작하였다. 1945년 8월 최채는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고 1946년 5월까지 화북조선독립동맹 진서북분맹 주임을 맡으면서 국민당점령구에서 지하공작을 했다. 장기간 적후에서 지하공작을 했던 원인으로 1945년 일본제국주의가 투항한후에도 최채는 줄곧 조선의용군과 행동을 같이 하지 못했다.

  1946년 5월 최채는 상급의 지시에 따라 태원시에서 지하공작을 접고 동북으로 파견돼 동북민주련군 할빈위수사령부 독립 8퇀 교도대대 교도원을 맡았다. 1947년 12월말, 그는 사업의 수요로 부대에서 지방정부로 옮겨 길림성인민정부 민족청 편역과 과장을 담임했다. 림춘추가 민족청을 조직하면서 조선족간부가 급히 필요했던것이다.

  이때 전국적으로 아직 전쟁이 한창이였고 후방인 연변에는 해야 할 일이 태산같았다. 최채는 또 조직의 지시에 따라 연변일보사 사장과 연변인민방송국 국장을 겸해서 맡았으며 1948년 11월 림춘추가 연변전원공서 전원으로 옮겨가면서 중공연변지구위원회 선전부장으로 임명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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