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인물  
     
 
새하얀 유골
 
 
http://www.hljxinwen.cn
2011-09-19 11:12:08
 
     
 

  하얼빈쌍태 고 정강환 회장을 추모하며


고 정강환회장(좌)이 올해 7월 초 오상시 민락벌에서 진행되는 신풀이 기능성쌀 대비 벼포전을 둘러보고 현지 시범재배 농민과 기념촬영을 했다. 이 사진은 고인이 남긴 마지막 사진이 됐다. /이수봉 기자

  
        고 정강환 회장 소개

  1945년 7월 20일 한국 경남 진주에서 출생(진양 정씨 가문의 7남매 중 6째)

  한국의 최고명문인 경남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를 졸업

  정부기관인 상공부에서 사회 첫발을 내딛음

  이후 한일합섬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해 최연소 기획실장을 역임

  1983년에 한국핵심부품인 미디어를 미국에 이어 세계 두 번째로 생산에 성공해 한국 벤처기업 1호라는 칭호를 안음.

  고인 정강환 회장은 경제방면에서 뛰어난 두뇌와 천재적인 재능을 발휘해 컴퓨터를 비롯해 많은 전자 부품산업과 건설부분과 방송관련 사업 등 많은 영역에 진출했고, 26개에 달하는 계열사를 거느리는 거대한 태일그룹을 건설하여 한국재계에서 주목받는 기업가로 우뚝 서게 되었다. 1991년에는 3억불이라는 막대한 자금을 중국 하얼빈에 투자하여 쌍태전자유한공사를 설립해 한국과 중국 경제 산업부분의 큰 역할을 담당해 한국 산업계의 큰 별이 되는 수많은 업적을 남겼다.

  또한 정강환 회장은 기업가로서의 능력뿐만 아니라 정부기관에서도 많은 공헌과 업적을 남겼으며, 전 김영삼 대통령 시절에는 행정쇄신위원회 위원, 금융개혁위원회 위원, 규제개혁위원회 위원 등 대통령 직속 자문기관의 자문위원으로 일하면서 한국정부 정책 설립에도 많은 기여를 했다.

  고인의 이러한 공로가 인정되어 한국 정부로부터 철탑산업 훈장과 한국 전자 공업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토록 평생을 일에만 몰두했고, 최근에는 중국 동포사회의 발전을 위해 혼신의 노력을 경주하며 동분서주해 농촌현장을 숨가쁘게 돌아다니면서 오직 일에만 전념하다가 갑작스런 병환으로 2011년 7월 12일 아침 7시에 하얼빈에서 유명을 달리했다.

  팽연왕겨

  2009년 7월 10일 하얼빈쌍태언어학교 교장 황보창(원 오상시민락조선족향 향장)이 한 손님을 모시고 나를 찾아왔다. 그 손님은 하얼빈쌍태언어학교 동사장 정강환 씨였다. 왜소한 체구에 소박한 옷차림, 둥근 얼굴에 안경을 낀 겸손하면서도 항상 명상에 잠겨있는 듯한 표정인 분이었다.

  손에는 각종 문서서류로 꽉 들어차 잠그지도 못한 크고 무거운 손가방이 들려있었다.서로 인사가 끝나자 정 회장은 "내가 알건데 농민들이 벼모를 키우는데 모상토가 점점 부족하다는데 혹시 한국산 평연왕겨가 이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이 될까 하여 한 포대 가지고 왔으니 권 동무에게 육모 실험을 부탁합니다"라고 했다. 나는 쾌히 승낙했다.

  민락조선족향영농협회 성원들은 박일성의 집뜰 안에다 벼 육모 실험을 하였는데 결과 팽연왕겨와 초탄흙을 절반씩 섞어서 키운 모가 가장 단단하고 또 경제적이었다.이로서 팽연왕겨 육모실험은 성공적이었다.

  8월 중순, 정 회장은 해당 인원들과 함께 실험지를 돌아보시며 몹시 흡족해 했다.그후 그는 "팽연왕겨 원가 계산서(추정)"을 작성하고 향후 농민들에게 보급할 계획을 구상했다.

  신풀이 동우회

  2010년 1월16~17일에 하얼빈서 동북3성 조선족촌간부 규모화 벼재배농민, 유지인사, 한국농업전문가, 농업경영인등 50여명이 참석한 '새농촌건설과 농업생산성 향상을 위한 교류회'가 열렸다. 붕괴되고 있는 조선족 집체마을을 지키고 살리기 위해 농촌 제일선에서 헌신적으로 활약한 이들의 마음속에서 우러러나오는 발언은 회의 참석자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정강환은 "수전 집체마을 살리기 위한 운동"을 일으키기 위하여 "조선족 신풀이 동우회"를 결성할 것을 건의했으며 친히 "합의문"을 작성하고 발표했다. 음성은 비록 낮았으나 한글자 한글자 또박또박 힘있고 격정적이었다. 회장은 치치할시 용사구 명성촌 방상덕 씨였다.

  동우회의 건립목적은 "붕괴되고 있는 조선족 수전집체마을을 지키고 나아가 되살리자는데 취지를 두었다. 즉 농호유실방지, 귀농촉구, 정보교류 등의 사항이었다.

  동우회가 할 일은 "정부의 건설정책에 앞장서서 촌민 전원이 참여하는 합작사를 설립하여 동포농호를 지키는 일, 유실농호를 회복하는 일, 규모경영의 길을 모색하고 동포농촌의 농업소득을 획기적으로 올리는 일, 농외 소득을 올리는 일, 농한기 일거리를 마련하는 일, 유무형 민속문화를 보존확산시키는 일, 유소년교육을 지키고 발전시키는 일" 등이다. 정 회장은 이런 일들을 조직하고 밀고 나가기 위하여 각 방면의 노력을 다했다.

  월성종식유한회사

  2009년 봄, 정 회장은 중국농촌현실과 당중앙1호문건정신에 근거하여 월성다종농업개발원유한회사를 세웠다. 2010년 9월에 '월성벼재배유한회사'로 이름을 변경하고 10월 29일 아성에서 설립대회를 열었다. 회사 사장은 하얼빈시 아성구 아스하가 성건촌의 김정옥 여사다.

  이로서 정 회장은 중국조선족 집체마을의 회생사업을 위하여 중요한 두가지 조직기구를 해결했다. 즉 사업의 주력조직인 '동우회'와 경제활동조직인 '농업합작사'이다.

  정 회장은 이 두 조직기구를 영활하게 운용함으로서 해야 할 일들을 계획에 따라 하나하나씩 밀고 나갔다.

  동북 벼 농사의 문제및 대책

  2009년 정회장은 8개월간의 일정으로 쌓인 피로를 극복하면서 동북3성 30개현 56개 조선족향촌을 다니면서 광범위하고 세밀한 조사를 했다.

  분석을 거쳐 문제의 근원을 찾고 상응한 해결대책을 제기했다. 이런 내용들을 담아 두 권의 큰 장편 저서를 출판했다. 즉 "중국 동북 벼농사의 문제대책"(2009년 9월 초고, 2010년 3월 수정고)와 "붕괴되는 중국 동북3성의 조선족 집체마을의 재생을 위한 연구"(2010년 12월)이다.

  조사를 거쳐 정 회장은 중국 조선족동포에 대한 인식을 천명했다. 그는 중국 조선족의 역사적 이민사를 간술하고 나서 현재 중국 주재조선족의 선조는 용감하고 개명한 분들이었으며 그들은 농촌에서 황무지를 신풀이했고 성시주민은 한국의 건국, 인재보고가 되었다고 객관적으로 높이 평가했다.

  현재 중국동포 농촌사회의 실태와 해결방안을 서술할때 그는 "동포농지는 공중화학반응이 거의 끝나고 있는 실증"이라면서 문제의 엄중성을 밝혔으며 "농업에 종사하지 않고 농민 호구만 갖고 있는 분까지꼭 보호해야 할 국가나 정권이 있을까?"라고 날카롭게 지적했다.

  해결대책은 "1997년 호구부에 기재되어 무상도급을 분배받은 모든 동포들을 참여시킨 합작사를 설립하여 합작사가 규모경영의 길을 개척해야 한다"고 밝혔다.

  또 "합작사는 돈을 모으기 위한 수단이 아니고 동포들의 재산권을 보호하는 수단으로 운용되어야 한다. 촌민위원회와 합작사는 한족에게 사용권을 양도한 부분에 대해 한건한건 세밀히 분석하여 사용권 회수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지적했다.

  정 회장은 이와 같이 사회조사와 분석을 거쳐 목적있고 방향있게 또 이론과 실천적으로 한 가지 한 가지 구체사업을 추진해 나갔다.

  신풀이 기능성 쌀(배훈진쌀)

  정 회장은 한국국제농업개발원 이병화 소장과 손잡고 2010년 배훈진쌀 시범재배를 틀어쥐고 면적확보, 품종선택, 지방선택, 물자조달, 기술전수 등 여러모로 움직였다. 가을에는 수구와 가공 포장으로 분망했었다.

  2010년 10월 28일~29일 하얼빈시 아성구에서 배훈진쌀 식미감별회를 열고 몇가지 품종 배훈진 쌀가운데 오상에서 생산한 "오우도 4호"(원도화향 2호)에 베타글루칸을 처리한 쌀을 으뜸으로 선정하고 '신풀이쌀' 상표를 등록하고 시장에 출하했다.

  하얼빈, 장춘, 다롄, 칭다오, 웨이하이 등지로 판매길을 열어 '신풀이 기능성쌀'을 홍보했다. 2010년에 250헥타르의 면적에서 생산한 1200톤의 쌀을 몽땅 계획가격에 처리했다.

  특히 2011년 초봄 장춘에서 진행된 전시회의에서 호황을 이루어 전시회 기간은 물론 전시회가 지난후에도 '신풀이 쌀'을 찾는 고객이 많았다고 한다. 그리고 오상시 민락조선족향의 곽장분 당뇨병환자는 2년간 치료를 하다가 금년 1월부터는 '신풀이 쌀'을 식용한 후 일체 약물치료를 중단하였는데 지금까지 혈당이 6안팎에서 안정되고 있다.중국조선족이 생산한 첫 기능성쌀이 시장에 선을 보였다.

  2011년에는 설명절을 쉬기 바쁘게 전성 농업기술강좌를 조직해 새해의 '신풀이 쌀'생산지방선택, 면적확증, 종자내원선정, 물자 조달, 자금 마련, 모판 육모와 전간관리 등 사항들을 낙착하였다. 회의 후 합동낙착, 모판고찰, 전간검사 등 사업으로 그의 승용차는 매일이다싶이 하루 몇백리의 길을 다녀야 했다. 금년에는 500 헥타르의 면적에 '신풀이 쌀'을 재배할 것이 낙차되었다.

  한국 농기계지원 사업

  정 회장은 중국 농촌현재 가정 도거리 농사체재에 비추어 한국 농촌 체재와 비슷한 점을 감안하고 지난날 한국에서 사용하던 소형 농기계가 중국농촌 현실가정 농사일에 알맞음을 가늠하고 한국 해당부문에 자기의 의사를 반영했다.

  한국 행정안전부에서 지원하고 (재)국제농업개발원의 주최로 "조선족 동포 농촌 마을부흥과 신농촌 건설을 위한 획기적 소득증대 사업"을 벌렸다. 그 일환으로 조선동포마을에 농기계를 전달했다.

  2010년 6월 12일, 하얼빈시 아성구 아스하향성건촌에서 기증식을 열고 20만위안 어치의 논두렁조성기 두대와 동력분무기 7대를 6개 조선족촌에 전달했다.

  2010년 8월 3일, 오상시민락조선족향에서 또 기증식을 열고 20만위안 어치의 간이수확기 5대를 조선족촌에 기증했다. 또한 오상시 민락조선족향익산농기계유한회사에 위탁하여 논두렁조성기 60대를 생산하여 각지에 공급했다.

  오미자술과 막걸리

  정 회장은 어디 갈 때마다 꼭 손수 생산한 술을 가지고 다니며 손님들을 접대했다. 2010년까지 '쌍태오미자술'을 가지고 다녔다. 특별한 것은 술병마다 융단천으로 술주머니를 만들고 포장했으며 겉에는 '쌍태오미자술'이라고 금박의 글을 박았다.

  이름 그대로 다섯까지 약재로 담근 오미자 약술이었다. 오미자술의 유래에 대해 정 회장은 이렇게 해석했다. "사람이 이 세상에 살다보면 갖가지 달고 쓰고 맵고 자고 신맛이 나는 일들을 겪어야 하지 않는가" 오미자술을 마시면서 인생오미도 느끼면서 마시자는 뜻이란다.

  농민들의 농외소득을 늘리기 위해 정회장은 막걸리생산도 여러번 권고했고 또 손수 이일에 착수했다. 막걸리는 조선족의 전통음식의 하나로서 상당한 사람들, 심지어 외국인까지도 한국에 오면 막걸리를 찾는 사람이 많이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막걸리를 생산하고 남은 술찌꺼기는 비료로 쓸 수 있고 사료로도 쓰이며 액체비료C약로도 벼 생산에도 유효하게 쓰인다고 했다. 그는 한국우곡양조종합연구소 배상면 사장과 연결해 막걸리 양조기술을 중국동포들에게 전수할 것을 약속했다.

  2010년 겨울 흑룡강성 제1회 학원 6명이 한국에 가서 무료로 (오가는 여비를 포함)기술학습을 마치고 돌아왔다. 정 회장도 친히 수차례 시험을 거쳐 질좋고 맛좋은 막걸리 양조에 성공했다.

  뜨락 채소재배

  금년봄 상하이에 출장갔던 정 회장은 한국인 채소경영회사 회장을 만난 그 회장과 함께 오상을 찾아와 정회장과 같이 채소재배와 시장개척 문제를 두고 면담했다. 모심기가 끝나자 정 회장은 2300위안 어치의 무씨를 비롯한 각종 채소씨를 사 가지고 오상시민락조선족향 최순자 씨의 농가에 찾아왔다.

  채소 재배에 대한 의사를 이야기하고 모판자리 채소를 심기로 했다. "채소가 잘 팔릴지도 모르는데 이렇게 많은 밭을 가꿨다가 채소가 적치되면 어쩝니까?"라는 필자의 물음에 정 회장은 "일이란 자꾸 만들어야 되고 물건이 있으면 상인이 찾아오고 시장도 생깁니다. 한번 해보세요. 안되면 여러 농호들에게 나눠줘서 먹으면 되지 않겠습니까?"라며 아주 낙관적이었다. 그는 만약 쌀도 남아서 팔지 못하면 막걸리를 만들면 된다는 호방하고 낙관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

  무를 심은 후 정 회장은 수시로 생장정황을 요해하고 지도했으며 자주 찾아와 돌아왔다. 7월 10일 무를 뽑는 날, 정 회장은 몇몇 일꾼들과 같이 와 친히 무뽑는 노동에 참가했다. 신체가 허약한 그는 몇번이나 그 자리에 쪼크리고 앉아서 고달프고 아픈 몸을 지탱하고 있었다. 이 날이 그의 마지막 행차 일줄 누가 꿈엔들 알았으랴!...

  농업기술 교류

  정 회장은 농업인재양성과 한국의 선진 농업기술을 전수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했다.

  2010년 1월 15일~16일, 하얼빈에서 "새농촌건설과 농업생산성 향상을 위한 교류회"를 이어 2010년 12월15일 에는 오상시 민락조선족향에서 한국 "생명환경과학기술연구소" 박대홍 소장을 모시고 녹색식품생산기술의 실현방향, 생명환경과학, 식물 미량원소, 미생물응용, 유기게르마늄합성등 내용의 기술을 보급시켰다.

  2011년 2월15~16일에는 아성에서 품종선정, 전간관리, 비료관리에 관한 교류회를 가졌으며 2011년 3월 28일에는 오상시 민락조선족향신락촌에서 한국 강양순농업박사를 초청하여 '큰손'표 규산비료에 대한 강의를 청취했다 .

  2010년도의 벼생산에서 한국산액상, 임상 정제 규산비료사용효과가 상상외로 좋았다.금년 상반기 벼생산에서 규산비료는 역시 뚜렷한 우월성을 나타내고 있다.

  한편 정 회장은 한국국제경제개발원에서 꾸리는 잡지 '상업농경영', '농업기계'를 들여와 발급함으로서 한국의 농업과 선진기술을 널리 홍보했다.

  농업인재들의 소질을 향상시키고 안목을 넓혀주려 정 회장은 또 해당인원들을 청도 쌍태회사, 장춘,하얼빈박람회, 농촌대형하우스, 구태홍관촌현대화농기계농장지를 다니면서 참관 견학시켰다.

  정 회장은 동포사회농토보존, 동포농촌의 재건발전을 위해 중심적 역할을 하는 한편 재중동포들의 비자난 문제로 한국진출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동포들을 위해 각 방면으로 노력했다.

  우선 재중동포중 한국진출을 기다리는 부류의 사회현상과 시험, 추첨, 사기, 불법 등 상황에 대한 조사를 거쳐 상응한 해결과 대책을 한국정부에 건의하고 실시할 것을 조언했다.

  또한 하얼빈쌍태언어문화학교에서 한국출국을 바라는 3000여명 동포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 2009년 11월 1일에는 "동포사회에 알리는 글"을 발표해 쌍태언어문화학교를 통하여 사기에 속지 않고 떳떳이 한국출행을 시도할 것을 귀뜸했다.

  새하얀 유골

  7월 12일 아침, 정회장은 갑작스레 그리고 조용히 이 세상을 떠났다.

  장례식 후, 화장을 거친 정 회장의 유체는 세개의 유골쟁반에 받쳐 나왔다. 아니 유골이 어쩌면 저렇게도 흴까?..유골은 정회장의 마음을 반사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정 회장의 안목은 넓고 사물에 대한 분석은 무게가 있었다. "세계경제환경변화와 농업에 대한 소견"에서 정 회장은 "첨단사업에 대한 인간욕구가 한계에 도달하여 세계경제난을 조성했다"고 지적했다.

  개발, 관리, 판매능력이 강한 어떤 기업들은 "수요가 공급을 창조"한다는 원칙마저 버리고 있지도 않은 새로운 수요를 창출한 것이 아니고 있는 수요 범위내에서 복잡한 시장골목에서 수많은 사람을 짓밟고 얻은 결과로 대단한 성적을 이뤘음을 감안할 때 씁쓸하기 짝이 없다고 꼬집었다.

  아울러 아직까지 농업과 농사를 혼돈한 정책사항을 극복하고 "기업경영개념"과 "가사노동행위"를 정확히 가름으로서 농촌경제발전을 추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 회장은 사업 중에서 많은 부류의 사람들과 만나 교제했다. 이를테면 각 정부관원, 기관, 사업가, 상인, 농민, 지성인들과 내왕하면서 사업을 밀고 나갔다.

  정 회장은 매체도 매우 중시했다. 그는 흑룡강신문, 흑룡강조선어방송국, 오상텔레비전방송국, 길림신문, 한국 KBS방송국, 연합뉴스 등 매체들과 내왕하면서 사업을 추진해 나갔다.

  정 회장의 두뇌는 쉴 새 없었다. 정회장 사업의 차바퀴는 끊임없이 굴러갔다.

  그는 피로했다.

  그는 기진맥진했다.

  그는 쉬어야 했다.

  그는 편한 쉼터로 영원히 갔다. 그의 발자취와 정신은 우리에게 가슴 깊이 새기어 영원토록 기억될 것이다.

  /오상시 권운룡

 
     
  | | |
| | | ·
| · | |
| | |
 
  Copyright @ hljxinwen.cn.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