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태수, 주재혁… 함께 전쟁터에서 생사를 같이한 전우들이여! 보고싶구나.”
10월 27일, 룡정시에 거주하는 항미원조 참전군인 김학득(92세) 로인은 70년 전 함께 전쟁터에서 정을 나눈 전우들의 이름을 부르며 당시를 회억했다.
1928년, 룡정시 동성용진의 가난한 농민 가정에서 태여난 김학득은 3살에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와 함께 힘들게 생활했다. 설상가상 집안의 기둥이던 아버지마저 신체가 나빠지면서 어린시절 김학득 부자는 내내 가난에 시달려야만 했다.
“공부를 못한 것이 평생 한이요.”
김학득은 학교 문도 들어가 보지 못한 채 아동공으로 일하면서 얼마 안되는 로임을 생활에 보탰다.
그러던 1947년 어느 날, 18살난 김학득은 마을에서 군대를 모집한다는 소식을 접하자 군대에 지원했다.
김학득은 중국인민해방군 장춘 439퇀에 입대하였고 그 이듬해에는 장춘제1차 전쟁, 장춘포위전 등 전쟁에 참가했다.
1950년, 김학득은 중국인민지원군의 신분으로 항미원조에 참가했다. 조선에 도착하자 총소리가 밤낮없이 울렸고 적들의 전투기들이 하늘에서 무섭게 날아다녔다.
“조선에 있는 동안 모든 것이 힘들었지만 가장 힘든 것이 잠을 자지 못하는 것이였소.”
하루도 발편잠을 잘 수가 없었고 련속 3일 밤을 못 자는 일은 보편적이였으며 잠을 자도 집이 아닌 어두운 토굴에서 잤다.
“이젠 나이가 들어 70년 전 일들이 잘 기억나지 않지만 황태수와 주재혁이라는 이름만은 잊을 수 없소.”
김학득은 전쟁 당시 황태수, 주재혁과 유난히 끈끈하게 지냈는데 세 전우는 음식이 생기면 나눠먹고 짬이 나면 서로 자신의 고향 소개와 고향에 있는 부모이야기를 나누었다.
“나의 사촌동생이 엄청 이쁘게 생겼는데 전쟁이 끝난 후 만일 너희중 누군가 결혼하지 못했으면 나한테 찾아오너라. 내가 사촌 녀동생을 소개시켜줄게.”
“내가 너의 사촌 녀동생과 결혼하면 우리는 영원히 한가족이 될 수 있겠구나.”
김학득이 롱담조로 고향에 있는 사촌 녀동생 말을 꺼내자 옆에 있던 전우 황태수는 얼른 롱담을 받아치면서 이야기를 재밌게 이어나갔다.
“나의 아버지가 홀로 고향에 남아계신다는 것을 안 황태수와 주재혁은 함께 아버지를 걱정해주었소.서로의 고향집 주소를 남기면서 꼭 살아서 다시 만나자고 약속도 했다오.”
이렇게 김학득은 마음이 맞는 두명의 친구를 만나 전쟁터에서의 무서움을 이겨내고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함께 나누었다.
1952년 귀국한 김학득은 한달음에 고향집으로 달려갔다. 집문을 들어서니 아버지는 원래보다 더 쇠약해져 있었다. 살아 돌아온 아들을 보고 김학득의 아버지는 힘든 목소리로 “살아서 돌아왔구나. 살아서 왔으면 됐다.”라고 넉두리했다고 한다.
그 후 김학득은 당시 련락처를 주고받았던 전우들의 주소 대로 수소문해보았지만 현재까지 련락이 닿지 못했다.
김학득은 당시 수여받은 2급 전사영예훈장, 군공훈장과 퇴역군인 증서를 꺼내보면서 전우에 대한 그리움의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다.
/연변일보 김란화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