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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정의 명산과 명인-제1편]고목 기슭의 옛 샘터를 찾은 그 도사
//hljxinwen.dbw.cn  2018-06-12 10:22:00

베이징 김호림 특별기고

용정 지신진 성동촌 염지밭골의 옛 가옥, 최서해가 한때 이 마을에서 살았다고 한다.

    (흑룡강신문=하얼빈)오랑캐령을 넘으면 솟을 바위 하나가 북쪽에서 엎어질듯 달려온다. 대립자(大砬子), 중국말 발음 그대로 달라자라고 불리는 벼랑바위이다. 두만강을 건넌 이민들은 이때부터 간도 땅을 발로 밟게 된다.

  바야흐로 수레의 자국을 따라 꽃향기처럼 피어나는 흙의 이야기는 이렇게 글에서 시작된다.

    오랑캐령을 올라서니 서북으로 쏠려오는 봄 세찬 바람이 어떻게 뺨을 갈기는지.

달라자에 현존한 옛집, 용정 지신진 성남촌에 있다.

  "에그 춥구나! 여기는 아직도 겨울이구나."

  하고 어머니는 수레 위에서 이불을 뒤집어썼다.

  "무얼요, 이 바람을 많이 마셔야 성공이 올 것입니다."

    나는 가장 씩씩하게 말했다. 이처럼 기쁘고 활기로웠다.

  작가 최서해(崔曙海, 1901~1932)가 소설 '탈출기(脫出記)'에 서술한 장면이다. 이때의 간도는 곧 하늘 아래에 살아있는 산수화를 그릴 듯 했다. 정작 '탈출기'의 세 식구는 1920년대 간도에 이주한 후 금세 오랑캐령의 강추위처럼 힘들고 달라자의 벼랑바위처럼 힘든 세파에 시달린다.

    그들은 촌 거리에 셋방을 얻어 살았다. 온돌장이(구들을 고치는 사람)로 일했다. 어머니는 나무를 줍고 아내는 삯방아를 찧었다. 나중에 주인공은 대구 장사로 콩을 바꿨고 콩 열 말로 두부 장사를 시작한다.

무학대사가 사진으로 찍혔던가, 고목에 돼지얼굴이 나타난다.

  품팔이, 나무장수, 두부장수… 실은 저자 최서해의 힘든 생활고의 한 장면이었다. 삶 자체가 소설이던 작가였고, 소설은 '체험의 작품화'의 소산이었다.

    최서해는 오랑캐령을 넘은 후 곧바로 염지밭골에 행장을 풀었다. 염지밭골은 오랑캐령의 일부인 오봉산(五峰山) 기슭에 위치한다. 마을 이름을 만든 야생 염지는 한때 이르는 곳마다 무더기로 자라고 있었다고 한다. 염지는 함경도 방언인데 부추라는 뜻이다. 훗날 염지밭골은 중국글로 지명을 적으면서 구전동(韭田洞)이라고 불리고 있었다.

  구전동의 최서해는 나중에 조선족 작가의 회억에 나타난다고 우리 일행을 안내한 남명철(南明哲)이 알려주었다. 남명철은 구전동이 소속한 오랑캐령 기슭의 지신진(智新鎭) 토박이다. 그보다 남명철은 문학인으로 고향에 등장한 작가 최서해에게 남다른 관심을 갖고 있었다.

  실제 "(최서해는) 생활난으로 1920년대 간도의 달라즈(자)에 와서 생활을 하였다… 자서전 같은 '탈출기'의 주인공처럼 어머니와 아내는 매일과 같이 두부를 앗아 연명하였다"고 채택룡(蔡澤龍, 1913~1998)은 그의 문집에 소상히 기록한다. 채택룡은 오랑캐령 바로 저쪽의 함경북도 회령에서 출생, 1938년 용정에 이주하여 조선족 아동문학의 창시자로 거듭난 문학인이다.

  "예전에는 구전동에 안내판이 있었다고 들었는데요, 그때 이 안내판에 ' '탈출기'의 저자 최서해의 고향'이라고 밝혔다고 합니다."

  이 안내판은 몇 해 전에 어디론가 '탈출'을 했다고 한다. 왜서 안내판이 잃어졌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안내판이 서있던 옛 마을은 더구나 30여 년 전에 벌써 '탈출'을 하고 있었다. 염지밭골의 구전동은 또 성동촌(城東村) 1대(隊, 촌민소조)로 개명하였다. 성동촌은 화룡현(和龍縣) 현성의 바로 동쪽 마을이라는 의미이다.

시초에 복구한 윤동주 생가, 지금은 용정의 명소로 가꿔졌다.

  화룡현 현성은 선통(宣統) 원년(1909) 달라자에 설치, 성안에 관청이 개설되었고 또 점포, 수공업장 등이 개설되었다. 달라자는 이민들이 북간도 내지로 들어오는 교통요지였다. 아흔아홉 굽이의 오랑캐령을 넘어서면 강기슭의 길을 따라 달라자에 이르게 된다.

  현성의 관청 아문(衙門)은 지신촌 1대에 있었다. 아직도 옛집 한두 채가 달라자에 잔존하고 있었다. 남명철은 옛 지명처럼 멀어지는 기억을 더듬어 땅위에 널어놓았다.

  "그때 최서해는 두부를 앗은 후 달라자에 와서 판 것 같다고 하는데요."

  소설의 옛 이야기가 다시 아문을 비집고 나오고 있었다. 두부요, 두부를 사요! 백옥 같은 그 두부를 남명철의 선인(先人)도 언제인가 밥상에 올리지 않았을까.

  남명철의 가족은 증조부 때 바로 오봉산 기슭에 이주하고 있었다. 최서해가 살았던 염지밭골에서 불과 몇 리 정도 떨어진 동네이다. 현성의 남쪽에 위치한다고 해서 훗날 지신진 성남촌(城南村) 6대라고 불렸다고 한다.

  마을은 동치(同治, 1861~1875) 말년에 생겼다. 이름을 장풍동(長豊洞)이라고 했다.

  "길 장(長), 풍작 풍(豊)을 쓰지 않아요? 해마다 풍작을 갈망해서 생긴 이름이라고 하던데요."

  마을의 어른들로부터 전해들은 이야기라고 남명철이 밝힌다. 그래서인지 애초부터 곡식이 잘 자라고 있었다. 마을을 개척할 때 콩의 꼬투리는 고랑을 메우고 있었다. 땅이 기름져서 콩과 풀이 한데 어울려 허리를 치고 있었다고 한다.

 복구한 송몽규 옛집으로, 윤동주 생가의 길건너 근처에 있다.

  장풍동은 오봉산에 들어서는 노루목이다. "예전에 동네 노인들은 산으로 들어가려면 먼저 제사를 꼭 올려야 한다고 하시던데요."

  옛 기억은 장풍동의 조밥과 옥수수떡, 산나물처럼 남명철의 동년을 갖가지로 뒤범벅하고 있었다. 옛날 오봉산 기슭에는 암자가 있었고 또 샘터가 있었다. 암자의 목탁소리는 샘에서 흘러나오는 물처럼 그칠 새 없었다.

  옛 샘터는 장풍동의 북쪽에 있던 남석동(南夕洞)에도 있었다. 남석은 평안도 방언으로 양지쪽이라는 의미이다. 옛 샘터는 세 고목의 기슭에 있다고 해서 삼고목(三古木) 샘터라고 불리고 있었다. 옛날 오랑캐령을 내린 길손들은 고목의 그늘 아래에 잠깐 다리쉼을 하면서 갈한 목을 달랬다고 한다.

  "동네 노인들이 말씀하시는데요, 조선 시대의 유명한 무학(無學)대사도 이 샘터를 다녀갔다고 합니다."

  남명철이 전하는 남석동의 전설이었다.

  전설에 등장하는 무학대사는 조선왕조의 건국공신인 국사(國師)로 5백년 도읍지 한양으로 천도를 주장한 풍수지리학의 대가이다. 그는 도참(圖讖) 비기(秘記)를 공부하고 백두대간을 숙지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백두대간의 지맥인 천불지산에 무학대사의 발자국이 나타나는 것은 이상하지 않다.

  웬 일인지 샘물은 오래 전부터 옛 길손처럼 종적을 감추고 있었다. 느릅나무가 장승처럼 여전히 샘터를 지키고 있었다. 느릅나무는 다른 고목과 달리 가지가 제멋대로 엉키고 구불구불 자라고 있었다. 특이한 수상(樹相)이었다. 동네의 신주(神主)라고 누구도 함부로 손을 대지 못한다고 한다.

검색엔진 바이두에 나오는 천불지산.

  기인(奇人)은 이상(異相)을 현시(顯示)한다. 무학대사는 특이한 골상(骨相)을 지니고 태어났다. 너무도 못생겼다고 해서 아버지는 탯줄을 끊기 바삐 멀리 내다버렸다. 학들이 날아와서 아기를 감싸 안고 보호하자 그제야 기이하게 생각하고 도로 데려다 키웠다고 한다. 정말로 얼굴 생김새가 못생겼나 본다. 무학대사가 훗날 왕으로 등극한 이성계(李成桂)와 지리산(智異山)에서 주고받은 농담이 있다.

  "대사(大師), 오늘 대사의 얼굴은 돼지 같이 보입니다."

  "전하(殿下)의 용안(龍顔)은 제 눈에는 부처님 같아 보입니다."

  "한번 웃자고 그랬는데 과인(寡人)을 부처님 같다니요?"

  "부처 눈에는 부처님,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이지요."

  우연이라면 기막힌 우연이 아닐 수 없다. 샘물터의 느릅나무 밑둥에는 뒤죽박죽의 돼지 얼굴 모양이 나타난다. 또 이 돼지를 우롱하듯 느릅나무의 왼쪽에는 웬 원숭이가 그네를 타고 있었다.

  정말이지 무학대사와 이성계의 야담이 고목에 이상(異相)으로 현시하고 있을까…

  실제 무속인(巫俗人)의 눈에는 달라자가 단지 산의 바위가 아니다. 하늘에서 새처럼 땅에 날아 내린 별이다. 와중에 천상의 문을 열어 글을 받은 도사를 문창성(文昌星)이라고 부른다. 글의 도사는 신통력이 통하여 글이 뛰어나다. 그 별의 도사를 하늘의 부처님이 일부러 점지하여 달라자에 내려 보냈던가. 최서해와 같은 글의 별, 도사는 달라자에 군체를 이루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길표식으로 되어 있는 명동 윤동주 생가 표지석.

  시인 윤동주(尹東柱, 1917~1945)의 글이다. 윤동주는 증조부 때 함경북도 종성에서 두만강을 건너 개산툰(開山屯) 일대로 이주, 1900년 조부 때 달라자의 명동촌으로 이사를 했다. 윤동주가 남긴 100여 편의 시는 오늘도 진실한 자기성찰을 바탕으로, 순수하고 참다운 인간의 본성을 그림으로써 해맑은 영혼의 징표로 되고 있다.

  윤동주는 오랑캐령의 기슭에 솟은 시단의 별이요, 별의 시인이었다. 그의 생가는 현재 명동 나아가 용정의 명소로 되고 있다. 학계의 일각에서는 윤동주를 일제시기 민족 독립의식을 고취한 '애국적 시인'으로 평가하고 있다.

  일찍 문학인으로 명동에 소문을 놓은 명인은 윤동주의 고종사촌인 송몽규(宋夢奎, 1917~1945)이다. 송몽규는 벌써 중학교 3학년 때인 1934년에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주변을 놀라게 했다.

  뚜렷한 민족의식으로 독립을 갈망했던 송몽규는 윤동주를 반일독립의 길로 이끈 키잡이였지만, 명동 나아가 연변에 새별처럼 떠오른 동주의 명성에 그늘이 가려 있으며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윤동주의 생가에서 바로 길 건너 쪽에 있는 송몽규의 생가는 아직도 명동 참관자들의 방문코스에 잘 나타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송몽규는 윤동주와 한 고향 한집에서 태어났고 함께 명동소학교에 입학하였으며 함께 용정 은진(恩眞)중학교에 입학하였다. 이때 민족주의자의 영향을 받아 중퇴하고 중앙군관학교 낙양(洛陽)분교 한인반을 다녔다. 이 한인반은 한국임시정부가 반일독립전쟁에 필요한 군사간부를 양성하고 있었다. 송몽규는 그의 뛰어난 문학재능을 발휘하여 군관학교에서 잡지를 꾸렸으며 이에 따라 별칭 '청년문사'로 불렸다. 1943년, 윤동주와 함께 당국에 체포될 때 송몽규의 죄목은 '조선인학생 민족주의집단사건'의 주모자였다.

  달라자의 방문록에 실종된 인물은 하나 또 있다. 조선의 초기 영화인 나운규(羅雲奎, 1902~1937)는 바로 명동이 배출한 인물이다. 나운규의 대표작 '아리랑'(1926)은 민족정신을 고향하고 또 흥행에 성공한 좋은 작품이다. 이 영화를 감독하고 출연한 후 나운규는 인기가 최고조에 달했으며, 조선 영화계는 그의 영향력에 의해 움직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일명 달라자의 선바위.

  남명철이 말하는 작가는 명동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북쪽의 장재(長財) 마을에도 글의 별이 떠오르고 있었다.

  "소설 '두만강'의 저자 이기영이 바로 장재의 동쪽 골짜기에서 살았다고 전하는데요."

  이기영(李箕永.1896∼1984)은 1930년대를 대표하는 소설가이다. 대하소설 '두만강'은 조선 역사소설의 시발점으로 평가되는 대작이다. 이 소설은 작가 자신이 살아온 시대를 총괄, 1930년대의 조선인들의 생활상이나 사건이 대부분이다. 그 시기의 식민지 수탈구조 그리고 무지와 몽매 속에서 허덕이던 농촌 현실을 고스란히 싣고 있다.

  암울한 그 시대를 소설에 담은 작가는 장재에 또 하나 있다. 향토문학의 별로 불리는 김창걸(金昌杰, 1911~1991)이다. 김창걸은 1936년 처녀작을 내놓은 후 1943년까지 '암야(暗夜)' 등 31편의 소설을 발표했다. 향토색채가 풍부하고 식민지 통치하의 암흑한 현실을 반영한 그의 작품은 학계의 높은 평가를 받는다.

  천불지산 기슭에 무더기로 나타난 글의 도사들은 달라자의 오색의 세계를 글로 옮기고 있었다. 남명철도 그의 세계를 선대의 도사들을 따라 글로 그리고 싶었다. 그래서 얼마 전 달라자에서 보고 듣고 깨달은 이야기를 수필집 '버들 화분'으로 엮어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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