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2년 2월 최채는 중앙민족사무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되였고 7월에 중앙인민정부에서 연변의 민족구역자치를 비준하면서 그는 연변조선족자치구 주비위원회 비서장으로 임명되였다. 9월 3일, 연변조선민족자치구인민정부 (후에 연변조선족자치주인민정부로 개칭)가 창립되면서 최채는 제1임 자치구인민정부 부주석으로 당선되였으며 정법, 민정, 문화교육 등 사업을 주관했다.
1952년 9월 3일 연변조선족자치구 제1임 부주석으로 당선된 최채(오른쪽).
1954년 12월, 최채는 중공연변지위 부서기로 임명되였고 1956년 12월에는 중공연변주위 제3서기로 임명됐다.
1958년 5월, 최채는 10년동안 몸을 담갔던 연변을 떠나 길림성민족사무위원회 주임으로 취직했다. 최채는 사업을 함에 있어서 아주 엄격했다. 그의 노력하에 길림성 민족경제와 민족문화교육 등 각항 민족사업은 기꺼운 성과를 거두었다. 최채가 민족사업을 주관하는 동안 길림성민족간부학교, 길림성민족가무단, 길림인민방송국 조선말방송프로가 섰으며 1958년부터 그는 전문가와 학자들을 조직하여 길림성내 조선족과 몽골족의 력사와 현황에 대해 조사하고 《중국조선족략사》, 《연변조선족자치주 개황》, 《장백조선족자치현 개황》, 《전고기몽골족자치현 개황》 등을 편찬하였다.
1960년부터 1961년 사이 최채는 길림성민족사무위원회의 10여명 간부를 이끌고 장백조선족자지현에 내려가 1년 반 동안 깊이 있는 조사연구를 진행해 존재하는 문제를 성당위, 성정부에 반영해 고도로 되는 중시를 불러일으켰다. 성당위와 성정부에서는 여러 부문의 령도들을 조직해 장백현에 내려가 현지사무를 보았으며 생산과 생활에 장기적으로 존재하던 문제와 곤난을 해결했다.
몽골족들을 도와 목축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1960년부터 1962년까지 최채는 성민족사무위원회 조사연구조의 간부들을 배치하여 전고르로스몽골족자치현, 진뢰현, 조안현 몽골족들이 집거한 향, 진, 촌, 툰에 내려가 목축업생산정황을 조사연구하고 실제곤난을 해결해준 한편 선진경험을 보급했다.
《문화대혁명》기간에 최채는 장춘감옥에서 갖은 박해와 멸시를 당했으며 1972년에 석방되자 구태현 음마하라는 농촌으로 《정배》를 내려갔다.
《문화대혁명》이 끝나고 당중앙 11기 3중전회 이후 최채는 다시 길림성당위 통전부 부부장 겸 성민족사무위원회 주임을 맡으면서 길림성정협 부주석으로 임명되였다. 1981년에는 길림성인대 상무위원회 부주임으로 선출되였다.
1985년 최채는 파란만장한 혁명사업의 제1선에서 물러났다. 비록 공직서류에는 1940년에 혁명사업에 참가한것으로 기록되여있지만 사실은 그보다 썩 전으로 거슬러 1932년에 이미 혁명에 참가했다. 그러나 그는 이를 구태여 따지지 않았다. 평생을 민족혁명가, 민족간부로 살아온 최채는 인생의 황혼에 비록 몸은 사업터를 떠났지만 마음만은 잠시도 민족사업을 떠나본적이 없었다.
2006년 8월 5일, 한생을 혁명과 당의 민족사업에 바쳐온 최채는 장춘에서 병환으로 9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길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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